전국 누비는 다문화여성밴드 '화려한외출' 나서다
▲ 동인천역 옆 '허리우드 악기사' 대표인 서순희씨는 우리나라 최초로 '아줌마밴드'를 결성한 주인공이다. 서 대표가 자신의 악기사에서 기타를 치고 있다.
▲ 13일 '허리우드 악기사'에서 다문화가정 성금 전달식이 있었다. 서 대표는 "다문화가정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4년전 중구이주민사회통합지원센터서 기타·노래교육 하다 인연
다문화여성들에게 동기부여 해주고 싶어 밴드 결성
인천여상 졸업 후 효성동서 악기사 … 10년전 아줌마밴드 결성하기도

순희. 이름 참 순박하다. 하지만 그를 마주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영어이름 '힐러리'가 훨씬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불꽃을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 몸에 착 달라붙은 가죽점퍼. 얼굴을 덮을 것 같은 선글라스. 서순희(54) 대표. 그는 동인천역 옆 '허리우드 악기사' 주인이다.

며칠 전, 그의 악기사 2층으로 한 무리의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쌍꺼풀이 진 여성들이었다. 다문화가정 여성들에게 서 대표가 건넨 건 20kg 쌀 13포대와 롤케익 13개다. 이날 성금은 서 대표가 이끄는 다문화여성밴드 '화려한외출'의 공연수입으로 마련한 것이다.

10년 전, 우리나라 최초로 '아줌마밴드'를 결성한 서순희. 그는 "인생시기별 인생매뉴얼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웃음지었다.

"30대는 사진에 미쳐 살았구요. 40대는 아줌마밴드를 결성해 음악으로 살았어요. 50대는 뭘 할까 생각했는데 다문화가정과 더불어 사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왜 하필이면 다문화가정일까.

"다문화여성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외로움을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어디 한 곳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지요."

서 대표와 다문화가정의 인연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타줄을 사려고 악기사를 찾아온 '중구이주민사회통합지원센터' 관계자가 물었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기타 가르쳐줄 자원봉사자 어디 없나요?"

눈을 '반짝' 뜬 서 대표가 말했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잘 찾아오셨어요?"

그렇게 4,5개월 아이들에게 기타를 가르치던 서 대표. 몇 개월 뒤엔 아예 센터로 찾아가 성인 대상 기타·노래 교육을 진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 대표의 가슴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끼'였다.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적 끼' 말이다. 2001년 '샤인'(shine)이란 아줌마밴드를 최초로 결성한 이래, 여성밴드 화려한외출(2006), 어쿠스틱밴드 화려한외출(2013)등 이미 여러 개의 밴드를 리드해 오던 터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외국인 여성들에게 뭔가 동기부여를 해 주고 싶었어요. 멋진 밴드가 될 거라고 확신했죠."

2013년, 우리나라 최초의 다문화여성밴드는 그렇게 탄생한다. 조용필만 위대한 탄생이더냐. 6인조 '다문화여성밴드 화려한외출'은 또하나의 '위대한 탄생'이었다. 2014년 동구 화도진 다문화축제 1등, 원주시청 초청공연, 인천은 물론, 전국을 누비며 '아줌마들의 힘'을 보여준다.

서울이 고향인 서 대표가 인천에 온 건 중학교 졸업 뒤인 17세 때다.

"서울 성북구에서 태어나 세 살 때 가족들이 철원으로 이사갔어요. 초등학교 때까지 운동화는 구경도 못 했고, 쌀이 없어 익지도 않은 파란 벼를 긁어먹던 기억이 나네요."

10남매의 여섯째 딸로 태어난 서 대표는 철원에서 성장하다 인천에 먼저 정착한 언니집으로 온다. 인천여상을 졸업한 그는 부평4공단 한국샤프전자와 한국전력 강남지점 등에서 몇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다. 건강 때문에 회사를 잠시 쉬던 그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은 건 25살 때이던 87년.

"직장 다니며 모았던 돈과 대출, 형부의 도움으로 계양구 효성동에 작은 악기사를 시작했어요. 음악을 좋아했거든요."

'효성악기사'는 손바닥만 한 가게였다. 일어서면 천정이 머리에 닿았다. 2년 간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 방 한 칸을 얻자마자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와 병간호하는 어머니,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왔다.

"악기사 일 보며 아버지 대소변 치우고 동생들 밥 해주고 그렇게 살았어요."

당시만 해도 부평4공단은 경기가 좋을 때였다. 또순이 서 대표는 또다시 2년 뒤 방 2칸짜리 전세를 마련한다. 장사가 재밌어졌다. 번듯한 가게를 갖고 싶다는 욕심이 올라왔다.

"마침 답동성당 옆에서 악기점 하던 사람이 가게를 내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대출좀 받고 여기저기 도움을 얻어 가게을 인수했지요."

현명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북적댔고, 기타를 공급해주는 트럭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90년대 초만 해도 신포동이 인천의 명동이었잖아요. '장사가 이래서 하는 거구나' 하는 걸 느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지요."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90년대 말이 되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인천·신포동 상권이 구월동으로 넘어가며 악기사를 찾는 발걸음도 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신포동에 있던 10년 동안 동생들은 대학을 졸업해 독립해 나갔고, 9년 간 누워계시던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던 시기였는데, 그제서야 스스로 저를 바라보기 시작한 거죠."

복잡한 생각들을 말끔히 걷어내기 위해 그는 새로운 도전을 결심한다. 다시 악기사를 확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게 본격적인 서순희 음악인생의 시작이었다. 아줌마밴드 샤인은 그렇게 2001년 지금의 '허리우드 악기사'로 이전하면서 결성한 밴드다.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최초, 세계 최초 아줌마밴드라고 할 수 있다. 아줌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용어 내지 단어이니까. 타이틀은 아줌마지만 사실 서 대표는 '돌씽'도 아닌 처녀다.

"사람에겐 세 번의 기회가 있다잖아요.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첫 번 째 기회였고, 악기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두 번 째 기회였어요. 아직 제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그가 이웃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제가 잘 살 수 있는 것은 많은 분들의 박수와 응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받은 걸 돌려주고 싶습니다."

번듯한 악기점 주인이자, 여러 밴드의 리더. 그리고 그의 가슴 가득한 사랑. '성공한 삶'은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즐겁게 해주는 이런 삶이 아닐까. "두 둥 두 둥!" '젬베'를 두드리는 그의 손끝이 세상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글 김진국·사진 이상훈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