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일보는 기사나 광고 모두가 대부분 인천의 소식으로 가득했다. 이는 대중일보의 뿌리가 인천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진은 인천관련 뉴스와 광고가 실린 대중일보 지면.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인천의 신문 '대중일보'는 1945년 창간해 '인천신보'로 이름을 바꾼 1950년 9월 전까지 인천시 중구에서 발행한 신문이다. 인천에서, 인천사람들이 만든 인천지역 신문인 대중일보는 인천 신포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인천지역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창간한 '인천의 대표언론'이자 국문을 기반으로 작성한 첫 신문이기도 했다. 창간사에서 "인천을 기반으로 한다"는 지역성을 확고히 명시하고 있는 대중일보가 다룬 뉴스는 99%가 인천관 관련한 뉴스였다. 대중일보가 게재한 지면을 랜덤으로 살펴본다.

● 기사 대부분 인천뉴스만 다뤄

'우리 조선의 서쪽 관문인 인천항에 자유의 소리를 전하는 신문이 탄생함을 경축할 일이다 …(중략)… 인천과 같은 국제항의 언론기관이 자기에게 부여된 자유를 우선 이 방향에서 가장 유효하게 사용해 주길 희망…(하략)"

1945년 10월 7일 임화가 창간 축사 '자유언론의 사용'에서 써내려간 내용이다. 이 글에선 인천항, 인천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10월8일에도 창간 축사는 이어진다. '향토인천의 낭보'란 사설에서 신태범 박사는 "향토 인천을 열렬히 사랑하며 인천의 형편이라면 자기 집안일 같이 잘 알고 계신 유지 몇 분이 사회정의의 옹호와 시민 문화의 건설을 도모하고 '순연히 인천을 기반으로 한' 일간신문 대중일보를 발간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인천의 한 시민으로서의 기쁨을 국하지 못하고…(하략)'라고 밝히고 있다.

그 해 11월 1일자 신문은 '입상자 발표 음악회-21일밤 "애관"에서'란 제목으로 인천음악협회가 21일 애관극장에서 주야 2회로 현상음악회 입상자들의 발표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으로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인천의 대표 아이콘이기도 하다.

같은 해 12월 2일은 '조선혁명자 구원회, 인천지부 결성'이란 기사가 눈에 띈다. 이 단체엔 고문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임홍재, 조봉암, 엄흥섭 등 인천시장, 정치인, 언론인 등 거물들로 나타나고 있다.

1945년 12월27일자엔 '창영초 학예회 성황'이란 기사가 났으며, 31일자는 '신탁권리 절대 반대'란 기사에서 인천시 각동장회가 신탁관리제 실시 절대반대를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결의문을 발표했다고 밝히고 있다.
대중일보는 정치적 측면에선 진보적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1946년 1월 1일엔 '신탁권리는 민족적 치욕'이란 기사를 통해 '신탁관리라는 국치적 비보를 접한 전국민은 비통의 감을 금치 못하는데 인천에서도 25만시민이 한 뭉치가 되어 이 모욕을 깨끗이 씻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획득하고 그저께 오후 2시 시내 인천 내리예배당에서 시내 각 정당, 사회단체, 직장대로 약 90여명이 참집하여 인천시민대회를 개최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듬해인 1947년 보도도 마찬가지다. 1월1일 '인천언론계의 전망'이란 기사에선 대중일보가 인천을 기반으로 한 언론임을 다시한번 천명한다. '해방 후 조선에는 신문사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여 참으로 가관이다. 인천만이 근근 두 신문사 뿐이다. 인천의 장래성으로 보든지 인구별로 보든지 신문사 둘은 많은 편이 아니다. …(중략) … 대중일보는 휴간 일차도 없이 발행하여 왔었고 차질되었던 인천신문도 초인적 활동으로 속간이 되었다는 것은 인천의 언론계를 위하여 경하하여 마지않을 일이다'

이를 비롯해 인천 시장에 대한 인천 시정 기자단의 항의문(1947.1.17), 인천해양대학 문제 낙착(1947.2.15), 인천상업학교 개교 50주년(1947.4.9), '소탕 인천 탕녀'(1947.7.11), 보건지 명승 월미도 재차 해방 단연 기대(1947.11.2), 야구협회에서 공설운동장 애호 결정(1947.11.18) 등 인천 뉴스로 가득하다.

1948년 역시 인천 근해에 해적 출몰(1948.2.14), 경전 인천지점 총파업을 결의(1948.3.19), 박문여중에 내분(1948.6.5), 선갑도 보고전(1948.6.19) 등 인천과 관련한 키워드로 넘쳐난다. 인천신보로 개제하기 직전인 1950년까지 대중일보의 뉴스는 인천소식으로 시작해 인천소식으로 끝을 맺고 있다.

● 광고 역시 인천이 대부분

대중일보에 실린 광고들 역시 인천의 소식이 대부분이다. 1945년 11월 19일 광고는 <월미>란 잡지가 원고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싣고 있다. '향토지 <월미> 투고환영. 시, 감상, 평론, 단편소설, 기타 문학작품과 미술, 음악 등의 일반 논문을 투고 환영,게재한 것은 감사료를 드리겠습니다.' 1946년 3월 6일엔 극단 백두산의 사극 '목화'와 현대극 '흑태양' 대공연이 5,6일 2일간 애관극장에서 공연한다는 광고가 보인다. 이 시기 많은 공연이 애관극장 무대에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4월 4일 영화 '수우'(愁雨) 광고문구는 '향도 인천의 인기 총집중! 조선 영화사상 최대 거작'이란 카피가 실려 있다.

● 인천만의 정체성 지면에 반영

본보가 대중일보 1945년 10월 7일부터 1950년 5월말일까지 대중일보 원본을 랜덤으로 분석할 결과 대중일보는 정치, 행정, 경제, 사회는 물론 문화 체육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인천과 관련한 뉴스란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대중일보가 창간사에서 천명했듯이 인천의 소식을 우선적으로 다루겠다는 의지와 약속을 관철한 보도태도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일보는 인천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은 인천의 신문이었던 것이다. 대중일보 창간 71주년을 맞아 인천의 언론인들이 인천의 언론주권을 되찾자고 뜻을 모은 것은 대중일보 인천만의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김형수 논설실장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