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언론인 김양수씨 "광복이후 가장 먼저 창간...념사업회 등 시작해야"
▲ 지난해 10월 대중일보의 후신인 경기매일신문 신사옥 자리에서 '대중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식'을 찾은 김양수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인천일보 DB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인천에서 발행된 대중일보는 지역 언론인들에게 '불편부당'의 참언론정신을 심어놓았다. 1945년부터 언론 강제통폐합으로 대중일보 맥이 끊기는 1973년까지 인천 언론사를 바라본 지역 언론인들은 대중일보를 "최초의 신문", "최고의 신문"이라고 말한다.

원로언론인 김양수(83)씨에게 대중일보는 전국적으로 가장 빨리 창간한 자랑스러운 인천의 신문이다. 김 선생은 인천일보와 인터뷰에서 "대중일보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간한 신문이고, 경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뿌리가 인천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대중일보를 기리는 일은 정말 좋은 일이죠. 지역 언론인이 반드시 역사를 지켜가야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951년 인천에서 전시판을 발행하던 대한신문 문화부를 시작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 일한 언론인이다. 인천일보에서도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논설위원을 지냈다.

지역 언론인들 대중일보 정신 계승

▲ 이장복(맨 오른쪽) 전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과 김응태(맨 왼쪽) 전 경기일보 편집국장. 종군기자로 베트남전을 취재했을 당시의 사진으로 추정된다./사진제공=이창숙 인천시 국학기공협회장

대중일보가 창간된 1945년은 광복으로 한민족이 기쁨에 겨울 때였지만, 사회 혼란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대중일보는 이런 상황에서도 광복 후 겨우 2개월 만에 창간호를 선보인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모두 인쇄기 찾고 사람 모으느라 시간이 걸릴 때였어요. 대중일보는 광복 후 지역 신문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거의 최초로 문을 연 셈이죠."

대중일보의 초기 논조는 '좌파'에 가까웠다고 했다. 대중일보 초대 편집국장이었던 엄흥섭은 좌파 문학인의 모임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가입해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창립자들은 사업가라서 초기에는 신문의 정치적 성향을 잘 몰랐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신문이 좌경화된다는 말을 듣고 중도를 지키자면서 바로 잡았죠. 그러니 화가 난 엄흥섭을 비롯해 몇몇 기자들이 나가서 인천신문(1946년 창간)을 만드는 일도 있었죠."

대중일보에서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까지 28년 역사에서 인천지역 언론인이 정권에 의해 고초를 겪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비공식적인 일이었던 데다, 당한 언론인들도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정권이 1973년 1도1사 통폐합 정책으로 인천지역 신문사 2곳, 수원지역 신문사 1곳을 통폐합하면서 대중일보 창립자였던 송수안 사장과 윤치봉 인쇄인, 조수일 편집인 겸 주필 등 몇몇 언론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대중일보 기념할 방법 찾아야"

대중일보는 인천 최초의 지역 신문이자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인천을 지킨 언론이었다. 1988년 언론자율화와 함께 창간된 신문들은 그 정신을 잇고 있다. 김 선생은 최초의 지역 신문 대중일보를 기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중일보를 잊힌 역사로 남겨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인천에서 태동한 신문을 인천에 발 붙이고 있는 언론들이 기념해야 합니다. 기념사업회도 당연히 시작해야지요. 인천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가 1973년 1도1사 통폐합으로 한을 품은 유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천에 터를 잡은 언론사들은 대중일보를 비롯해 지역 언론의 역사를 되새기고 창간정신을 잇고자 노력하는 게 맞습니다."

['이장복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 딸' 이창숙 인천시 국학기공협회장]
"아버지, 대중일보 자부심 대단 … 그 시절 편집국 생동감 넘쳐"


▲ 이창숙 인천시 국학기공협회장

이창숙(64·사진) 인천시 국학기공협회장은 고 이장복 경기매일신문(대중일보의 후신) 편집국장의 딸이다. 이 회장의 아버지는 1924년에 태어나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후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경기매일신문으로 옮긴 때는 1960년대 초반으로 전해진다. 그는 광화문에서 서울 분실장으로 일하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1972년까지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대중일보 자부심 대단"

이 회장은 기개 넘쳤던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언제나 꼿꼿했다. 경기매일신문이 최고의 신문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분이었다. 특히 대중일보를 잇고 있다는 생각도 강했다고 한다.

"휴일이 많지 않아서 집에는 잠깐 오셨어요. 가끔 오셔서 씩씩대시곤 했죠. 그런데도 기사를 못 내진 않으셨어요. 대중일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셨어요. 그때 경기매일신문 기자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을 거예요. 송수안 사장이 계속 있었고, 중앙동의 그 자리에서 계속 신문을 냈으니까요."

기자생활은 한국일보에서 시작했다. 경기매일로 옮긴 시기는 5·16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서울분실장으로 일하셨어요. 그러다가 1968년쯤 편집국장으로 발령 받으셨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5일장을 치르는데, 기자들이 휴일까지 반납하면서 내내 자리를 지켰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1972년 언론계를 떠난다. 병이 깊어진 탓이지만 회사 내부 사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도 그렇게 추측했다. 아버지는 결국 다시 현직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이장복 국장은 1988년 현 기호일보 창간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창간을 앞두고 다른 지역에서 기거하시던 아버지가 인천을 몇 번 찾아오셨다고 전했다.

▲"생동감 있는 지역신문 되길"

이 회장은 일하며 가끔 지역 언론사의 기자들과 마주한다. 과거보다 패기가 없는 기자들의 모습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예전 기자들은 활발하고 생동감이 넘쳤어요. 그런데 요즘은 표정이 죽어있는 것 같네요. 그때는 내가 최고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요즘은 아닌 것 같아요."

이 회장이 봤던 당시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앉아 있었다. 정권의 탄압이 목 아래까지 들어왔지만, 편집국은 절대 우울하지 않았다고 했다.

"압박이 그렇게 심했는데 어떻게 그리 밝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천의 기자들도 활기차게, 본인 소신대로 기사를 썼으면 해요. 사회에 경종을 울려 주시고요."


/박진영·송유진 기자 erhist@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