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계양산에 올랐다. 부근에 이런 산을 두고 굳이 멀리 있는 산만을 고집했던가. 설사 심산유곡은 아닐지라도 도심 가까이 산세 좋은 이런 산이 다 있다니.
 산 초입에 이르니, 키 작은 진달래와 포근한 얼굴의 목련이 언제 봄옷으로 갈아입었는지, 화사한 모습으로 반긴다. 인생 길은 외길인데,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이 길 저 길을 마음대로 택할 수 있으니 그 조차 자유롭다. 능선 따라 가려던 마음을 돌려 아기자기한 나무계단 쪽으로 발길을 향한다.
 한참을 올라가노라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도 차다. 겉옷마저 벗었건만, 땀이 줄줄 흐른다. 큰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한줄기 바람이 스치니, 자잘한 근심 걱정도 다 실어간다.
 산 중턱 오른편에 길게 누워있는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본다. 아버지의 등처럼 편안하고 푸근함이 전해온다. 나무는 말이 없지만, 마음을 당기는 힘이 있다. 그만의 소박함과 따듯함 때문이리라.
 키 큰 나무들의 쭉쭉 뻗은 가지들이 하늘을 덮고 있다. 십 수년, 아니 수 백년을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그 자태는 당당하며 의연하다. 불현듯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교육자의 외길을 40여 년이나 걸어오셨다. 오로지 아버지만 바라봐야 했던 여덟 식구는 경제적으로 늘 모자람 속에서 살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사촌오빠와 외삼촌을 사범학교와 대학까지 보내셨다. 그도 모자라 고향 떠나온 친지들까지도 다 당신 그늘로 불러들이셨다. 어린 마음에도 그러시는 아버지가 왜 그리 답답하던지. 한 때는 아버지 그늘에서 얼른 벗어나고도 싶었다. 내가 교직의 길을 외면한 이유중의 하나도 아버지처럼 가난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게다.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시던 아버지는 미군부대를 다니는 집주인의 월급이 당신 박봉의 몇 배나 된다는 말에 월미도 미군기지에서 취직시험까지 치르셨단다. 시험을 마치고 교정으로 들어서는데, 선생님! 하며 와락 안기는 아이들의 손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던 아버지. 자신이 뿌리내린 토양과 처한 환경에 순응하며 묵묵히 외길을 걸어오신 나의 아버지. 긴 세월 속에 갖은 풍상을 다 겪으셨을 터이나, 휘거나 꺾임 없이 제 자리를 꿋꿋이 지키신 분이 아니시던가. 사십 여 년이 지난 지금에 돌이켜 보니, 아버지야말로 나의 진정한 스승이셨음을 깨닫는다. 평생토록 자식들에게 땅뙈기 한 평을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신앙의 텃밭 속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북돋아 주신 아버지는 아직도 큰 나무로 내 곁에 우뚝 서 계시다.
 아버지를 나무로 친다면, 수령이 다된 노송이나 고목에 불과할 터이나, 그 가지에는 사시사철 텃새(자식)는 물론 이름 모를 새들까지 수시로 드나들며 지저귄다. 남들이야 그 만한 나이에 무슨 낙이 있을 까 하겠지만, 아버지 얼굴은 그윽한 미소와 기쁨이 넘쳐흐른다.
 남편 그늘마저 없는 나는 아버지의 너른 그늘 속에 오래 오래 머물고 싶다. 지금 나는 든든한 큰 나무 아래서 내 작은 나무들을 가리고 막아주는 중간 크기쯤의 나무일 게다. 먼 훗날 녀석들에게 아버지처럼 큰 나무는 못된다 하더라도 괜찮은 나무로 기억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