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민사박물관 개관 8주년
▲ 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 포스터

'또 다른 이민, 해외 입양' 전시
해외입양 60여년 이야기 조명
4개 테마 구성…11월27일까지


1953년 정전 이후, 대한민국에 10만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생겼다. 고아들은 캐나다, 미국 등지로 해외 입양을 가기 시작했다.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개관 8주년 특별전으로 23일부터 해외입양 60여년을 조명하는 '또 다른 이민, 해외 입양' 특별전을 개막했다.

현재 재외 동포는 700만명, 그 중 해외 입양인은 2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전체 재외 동포의 3%정도를 차지하는 입양인들을 재외 동포의 일원으로 그리고 한민족 이민의 한 축으로 바라보고자 이번 특별전을 마련했다.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1부는 해외 입양의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고, 2부는 인천의 주요 보육기관을 소개하고 해외 입양 이야기를 다룬다.

3부는 모국을 떠나 낯선 땅, 낯선 가족들 속에서 입양인의 삶과 활동을 통해 한민족의 한 축으로서 그들의 삶을 알린다. 4부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입양인의 귀환과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번 특별전에는 많은 기관과 단체, 개인 소장가, 입양 당사자들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전시 소식을 듣고 입양 당시의 옷과 신발, 서류 등을 보내준 입양 당사자들과 이들을 돌보았던 인천의 보육시설 운영자들은 해외 입양의 역사를 대중에게 알리고자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소중한 자료들을 선뜻 대여해 주기도 했다. 전시는 11월27일까지 개최되며 입장료는 무료다.

▲또 다른 이민, 해외 입양

▲ 1950년대 미국에서 발행된 한국 고아 후원 홍보물 /사진제공=한국이민사박물관

20여만명의 해외 입양아를 사회복지의 경계를 넘어 한민족 이민사의 범주로 다루며 지난 60년을 되돌아 보자는게 이번 전시의 목적이다.

한국의 해외 입양은 전쟁으로 인한 10만명의 전쟁 고아에서 시작됐다.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불안정한 결혼 형태는 수 많은 미혼모를 양산했고 반세기 넘게 다양한 요인들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현재는 국내 입양 촉진으로 정책이 전환돼 해외 입양인의 수가 많이 감소했지만, 1948년부터 2004년까지 전 세계 입양인 50만여 명 중 3분의 1이 한국인이었다.

해외 입양이 성행한 배경에는 전쟁, 혼혈, 남아 선호, 미혼모, 혈통 중시 풍토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이 혼재해 있어 단편적 관점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복합적 주제이기도 하다.
해외 입양은 모국에서 품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가정을 찾아줄 수 있는 현실적 선택이라는 것과 함께 그들의 친생 가족과 한민족 공동체에서 그들을 분리시켰다는 이중적인 관점이 존재한다.

1부-한국 해외 입양의 역사

▲ 미국귀화증

한국의 해외 입양은 혼혈아와 전쟁 고아에서 시작돼 버려진 아이, 빈곤한 아이, 장애를 가진 아이 등 반세기 넘게 다양한 원인이 작용했고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1953년 정전 이후 국가는 안보와 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강조하여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의 문제는 외국의 원조와 민간 단체의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입양의 시작은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빈곤 가정과 가정을 이루지 못한 미혼모의 아이들 입양으로 이어져 점차 그 수가 늘어나 1980년대에는 해외 입양인 수 세계 1위 국가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88올림픽을 전후해 한국의 해외 입양을 비난하는 목소리와 함께 해외 입양인의 수가 꾸준히 감소하여 해외 입양을 억제하고 국내 입양으로 점차 전환되어 현재는 1985년 정점에 이르렀던 수치의 4% 수준으로 감소했다.

2부-모국의 마지막 보금자리, 인천

한국을 찾은 해외 입양인들 중 다수가 입양 전 출생지 또는 거주지를 인천으로 기억하고 있다.

인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기관으로 알려진 해성보육원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보육시설들이 운영되어 왔다.

1958년 운영을 시작한 혼혈아 보육 시설인 명성원, 1966년 덕적도를 시작으로 송현동, 부평3동, 산곡3동에서 운영된 성가정의 집, 1980년 설립된 성 원선시오의 집 등이 있었다.

인천의 보육시설을 거쳐간 해외 입양인들은 인천을 모국에서의 마지막 보금자리로 기억하면서 입양국에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모국을 찾아 한국에 돌아올 때에도 가장 먼저 밟게 되는 모국의 땅도 바로 인천이라는 점에서 입양인들에게 인천이라는 도시는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귀환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3부-낯선 땅, 낯선 가족과 입양인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하겠지만 부모 특히 생모에게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는 것은 아이와 자신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였을 것이다.

이런 기대를 뒤로하고 떠난 입양 아동의 대부분은 본인의 선택권이 없는 만 5세 이하의 어린 나이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입양 전 한국에서의 생활은 기억하지 못한 채 낯선 땅 낯선 가족과 하루 하루를 공유해 가면서 그 가족과 국가의 일원이 되어갔다.

3부에서는 입양 아동이 한국에서의 여러 서류 절차를 걸쳐 입양국 가정으로 입양되어 낯선 가족과 가족이 되어가는 다양한 일상의 모습을 소개하고, 나아가 입양인라는 공통점으로 제 3의 가족인 입양인 연대를 만들어 활동하는 입양인들을 안내한다.

4부-입양인의 귀환

성인이 되면서 본인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입양인들이 점차 자신이 태어난 모국으로 귀환하고 있다.

입양인들의 귀환은 해외 입양의 첫 세대가 성인이 된 1980년대부터 한국의 영화,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쇼 등을 통해 알려졌다.

매년 한국을 방문하는 입양인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입양인의 귀환은 각종 기관에서 진행하는 모국 방문 프로그램과 같은 단기 방문 뿐 아니라 친생 부모 찾기, 위탁모 상봉, 취업, 영구 귀환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다. 돌아온 입양인의 존재는 우리들에게도 재외 동포의 일원으로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민사 박물관 관계자는 "근대 한인 해외 이주사와 마찬가지로 해외입양도 고난과 슬픔으로 시작됐다"며 "그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부터 해외에서 성장한 남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입양인들을 재외동포로서 인식하고 그에 따른 배려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재외동포 사회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