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내에 급속히 확산하는 일본의 세력을 보고 있을 청국의 심사가 편할 수 없었다. 조선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던 처지였으니 말이다. 이런때 동학혁명을 계기로 두나라는 전쟁에 돌입했다. 1894년 7월25일 풍도 앞바다에서 포문을 열어 개전한 이른바 청일전쟁이다. 이 해전에서 청함은 일본 함포에 격침되고 대부분의 청군은 함선과 같은 운명이 되었다.

 이때 생존한 패잔병들이 야음을 타 전마선으로 인근 울도에 상륙 도움을 요청했다. 주민들이 옷을 걷어 입히고 식사를 제공한후 덕적본도로 이송했다. 당시의 구조된 청병은 204명에 이르렀으며 월미도앞 해상에 정박중이던 독일함과 교섭 우선 196명을 청국의 옌다이로 보내고 계속 구조된 80여명도 굴업도 해상의 미함을 통해 귀국시켰다.

 한세기전 청병을 구조한 울도는 덕적군도의 부속도서로서 인천항에서 남서로 74㎞-육지에서 멀어 덕적에서 중국의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설은 이 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울도는 대동여지도에도 기입되어 있는데 답답할 울(鬱)자의 울도였으나 1910년경부터 현재의 울(蔚)도가 되었다.

 울도라는 이름이 지어진데는 몇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절해고도에 시집온 새댁이 친정에 가기가 어렵고 거센 풍파에 문열고 살수도 없었으니 답답하고 서글퍼 울음이 절로 나와 울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울도는 울고 들어왔으나 인심이 좋아 나갈때는 울고 간다고 해서 울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섬의 전체 형태로 보면 북향하여 길게 굽어있는 형국이 흡사 울타리 모양이어서 울타리섬으로 불렸다는 것인데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울도는 젓새우의 어장으로 연중 7월을 제외하고는 파시로 흥청 덕적면중 가장 부촌으로 불리던 곳이다. 꽃게잡이도 한 때 성했다. 덕적팔경에 울도어화(蔚島漁火)라 함은 밤바다의 고기잡이 불빛이 장관이었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점차 어획량은 줄어 지금은 해중산촌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청일전때 은괴를 싣고 격침한 청함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화제이다. 과연 그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