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의 침략이 잦자 1232년 고려정권은 천험의 요새 강화도로 천도를 감행한다. 그리고는 송경과 같게 그곳이 바라보이는 북산을 송악이라 칭하고 그 남쪽 기슭에 궁궐을 조영한다. 또한 장기전을 각오하여 성을 쌓았다.

 성은 세겹으로 되어 있었다. 지금 고려궁지를 두르고 있는 1,2㎞의 석성은 내성이요 중성 외성은 남아있지 않다. 중성은 흙으로 쌓아 둘레가 9㎞였는데 8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며 외성은 동쪽 해협을 따라 3만77척에 달하는 거대한 토성이었다고 한다. 이들 성곽이 40여년 동안 몽고가 발들여 놓지 못할 만큼 물샐틈 없는 요새의 구실을 해냈다.

 하지만 강화성의 운명은 기구하여 외세에 의해 훼손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장기전 끝에 몽고와 화친 출륙하게 되자 몽고는 성을 철폐해야 한다는 단서를 내세워 1259년 헐어야 했다. 병자호란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초에 다시 축성했던 외성이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성곽 파괴는 음흉스럽고 극악했다. 그들은 교묘하게 우리 손으로 헐게하는 비열한 수법을 썼다. 개항기 인천에 각종 건설사업이 활발하자 “강화돌은 상돌”이라는 소문을 지어내 주민들이 스스로 뜯도록 유도했다. 강화돌이 양질이라고 알려지자 너도나도 현혹된 사람들이 성돌을 뜯어다 팔았던 것이다.

 그러느라 78년 강화호국유적 복원공사가 한창일때 성돌 되찾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덕진진의 문루를 세우는데 되찾은 성돌에 일일히 번호를 부여하면서 없어진 부분을 찾는 서글픈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성곽지키기의 전통은 그런중에도 면면히 이어졌다. 부녀자들의 성돌이가 그것이다. 성벽 인근의 여인들이 윤달이나 칠석에 성줄기를 따라 열지어 도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무병장수하고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피크닉이 달리 없었던 시절 그런 구실로 하루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성벽을 살피며 중요성을 깨우치는 기회가 되었을 듯 한다.

 제2회 강화산성 성돌이가 지난 18일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