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폐는 단순한 경제사범으로서만 아니라 전쟁수단으로도 이용된다. 성공할 경우 상대국의 경제를 뒤흔들어 직접적인 공격보다 더 심각한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2차대전말 독일이 항복한 며칠후였다. 2천만 파운드의 영국 지폐를 실은 트럭 한대가 미군에 인계되었다. 그리고 더많은 지폐가 오스트리아의 어느곳에 있다는 보고도 뒤따랐다. 영국은행의 간부가 달려가 확인했는데 물론 위폐였다. 영국의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 넣을 수 있는 나치의 위폐작전이었다.

 그동안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진짜와 구별이 어려운 위폐가 해외로 부터 흘러들어 왔으나 그것을 영국은행은 단순한 위폐단의 소행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위폐를 소지한 독일인 스파이가 체포된 후에야 독일의 짓임을 짐작했을뿐 한트럭분이 발견될 때 까지 확증을 잡을 수는 없었다.

 돈의 역사가 오랜 것 처럼 위폐의 역사도 오래다. BC 540년경 사모스섬을 지배하던 폴리크라테스가 위조한 금화로 스파르타인들을 속여온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도 고려때 위폐의 흔적이 보인다. 1101년(숙종6년) 왕의 조서에서 `근래에 간사한 자들이 구리를 섞어 금은을 만드니 중형을 내리라" 하고 있다.

 위폐는 인천개항사에도 나온다. 독립신문 1898년 1월29일자에 보면 인천에서 주조기와 재료를 구입한 4~5인이 위폐를 주조중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훈익옹의 `인천지지"에도 전환국의 주화에 편승 일인과 청국인들이 위조한 것으로 되어있다. 사창가의 화대로 위조한 은화 20전을 지불했다가 경찰에 꼬리가 잡혔다는 것이다.

 위폐는 제작비가 충당되어야 할 만큼 고액권이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는 만원권이요 외화로는 미화 1백달러권이 해외에서 우리를 겨냥해 들어오는데 인쇄기기의 발달도 그렇거니와 대규모의 위조단이 뒤에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월미도에서 만원권 지폐 17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폐는 정력을 기울였으면서도 유통은 거의 불가능하다. 거짓이 오래가지 못하 듯 위폐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