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문화체육부국장
▲ 김진국 문화체육부국장


장맛비 같은 봄비가 내리던 날이다. 차 라디오에서 노래 '아침이슬'이 흘러 나왔다. 양희은이 아닌 김민기의 목소리였다. 단전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깊은 내면의 소리였다. "투-둑, 투두둑" 차창을 치는 빗소리가 효과음처럼 앙상블을 이뤘다. 문득 30년 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제 막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새내기. MT에서 노래를 시키자 수줍은 미소로 얼굴이 빨개졌던 소녀. 큰 목소리로 '아침이슬'을 부르던, 고등학생의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았던 그 소녀의 통통하고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연두빛 이파리 같은 첫 사랑의 추억이었다. 영화의 다음 장면처럼, 최루탄과 전투경찰들이 난무하던 거리가 이어 등장했다. 80년대 중반 바보 같던 내 '젊은 날의 초상'까지도. 단지 '아침이슬'을 들었을 뿐인데…. '음악의 힘'이었다.

음악은 시대의 거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을 달래준 것은 '타향살이'(1934), '나그네설움'(1940)과 같은 가요였다. 광복 이후엔 '럭키서울'(1948), 한국전쟁 이후엔 '아리조나 카우보이'(1955)와 같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럭키, 모닝, 샌프란시스코 등등 당시 가사엔 영어단어가 즐비했다. 전쟁을 통해 만난 미국은 은인의 나라였고, 미국인들이 사는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이후 팝송번안과 통기타, 댄스, 발라드, 힙합 등을 거쳐 오늘의 K-POP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인천은 그런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중심에 있었다. 1950년대~60년대, 중구 신포동엔 예닐곱개의 미군클럽이 성업 중이었다. 신포동에선 언제나 재즈, 블루스에서부터 스탠더드 팝에 이르기까지 여러 빛깔의 서양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서양음악에 우리 전통가락을 접목한 음악을 만들어낸 가수 송창식은 어린 시절, 신포동의 팝음악을 들으며 가수적 감수성을 키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록그룹 '키보이스'의 김홍탁은 중학교 2년 때부터 내동에 살던 한 미군으로부터 기타를 배워 훗날, 우리나라 최초,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긋는다.

애스캄(ASCOM)부대가 있던 부평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신포동과 부평의 미군클럽, 미8군무대는 지금의 '한류'를 잉태한 자궁이었던 셈이다.

우리나라 '클래식음악'의 고향 역시 인천이다. 1885년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탄 배에는 피아노와 서양식 악보가 실려 있었다. 파란 눈의 선교사들은 제물포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찬송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인천의 교회와 학교에서 시작한 종교음악은 '민들레홀씨'처럼 우리나라 전역에 클래식음악의 꽃씨를 퍼뜨린다.

'민중가요'는 또 어떤가. 70년대~80년대 부평공단을 비롯해 인천의 공단이 민중가요의 산실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상록수'는 1977년 5월 인천 부평 봉제공장 취직한 김민기가 동네노동자 합동결혼식 축가로 작곡했고,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80년대 부평에 살던 박영근 시인이 쓴 시에 안치환이 곡을 붙인 노래였다. 이쯤 되면, '인천'은 대중음악, 클래식, 민중가요를 아우르는 음악의 메카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인천시가 '음악도시 인천'을 규명한다며 현재 인천의 노래를 수집 중이다. 이 것 만으로 음악도시 인천을 부르짖기엔 뭔가 부족하다. 대중음악에서부터 클래식, 민중가요를 아우르는 인천음악의 역사를 규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나라 음악사를 재정립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들릴 지 모르지만, 그런 다음 '국립음악박물관'을 인천에 유치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국립문화시설은 57개이고, 그 중 서울 25개, 경기 5개, 부산은 2개가 있는 반면 인천은 아직 한 곳도 없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지난해 유치한 게 전부다.

국립문화시설을 유치하기 위해선 시민, 시, 정치인들이 다 같이 애를 써야 한다. 오는 30일 새 국회가 시작될 것이다. '문화융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천지역 20대 국회의원들의 첫 활약상이 국립음악박물관 유치노력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김진국 문화체육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