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의 초파일밤 다보탑을 완성하고 이어 석가탑을 조영중인 불국사에 왕의 거둥이 있었다. 모두가 탑의 정교함에 탄복했다.

석공은 백제사람 아사달이었으며 일행중의 한 귀족 따님이 흠뻑 반했다. 그때쯤 고향에서 아내가 찾아 왔으나 바쁜 남편을 만날 수가 없었다. 석가탑이 완성되면 영지에 그림자가 비칠 것이며 그 때 남편이 찾아 오리라는 말을 듣고 못가에서 애타게 기다리다 못에 몸을 던졌다. 탑을 완성하고 달려온 아사달도 뒤따라 투신한다. 현진건의 장편 `무영탑"의 줄거리로 불국사 석가탑에 얽힌 전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신라의 탑은 신라인들의 삼국통일 성업을 완수하려는 정성의 표현이요 국가적인 의지의 상징이라고 전규태 교수는 말한다. 속담에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했듯 탑을 쌓는 일은 한층한층 마다 정성과 기원이 깃들인다. 서둘지 않고 시일을 두면서 정성을 들여 쌓는다. 그런만큼 탑은 얼이 담긴 흠모의 대상이기도 하다.

 탑은 인도에서 기원하며 성스러운 유골 즉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웠다. 독자적인 특징을 지니는 우리나라의 탑은 백제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원형은 전북 익산의 미륵사 석탑이다. 이것이 정림사지의 석탑을 거쳐 통일신라에 계승되는데 그 이전은 목탑이요 그것을 그대로 닮고 있다. 기록으로만 전하는 경주의 황룡사 9층탑도 목탑이었으나 1238년 몽고난때 오유화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웅대했는지는 지금 충북 법주사의 5층목탑 팔상전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영구 보존되어야겠다는 바람에서 차츰 석탑화했던 것이다.



 인천시의회 문사위원회가 보령시로의 석탑반환청원을 부결했다고 한다. 이유는 고증도 정확치 않고 보령시에서 주장하는 동일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3층석탑은 고려중기의 것으로 시장관사이던 일본인 별장에 있던 것으로 현재 시립박물관 뜰에 세워져 있다.

 문화재의 소재지로 국가간이든 지자체간이든 시비가 이는 것은 그것이 미술품이라는 점 때문이다. 건조물로서의 탑이 아닌 그속에 숨겨진 진리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