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역에서 부평역을 지나 시계까지 고가로든 육교밑으로든 자동차로 경인선을 가로지를 수 있는 지점은 열서너곳이다. 그러나 철도의 연장 길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통과할 수 있는 길목이 부족하다함은 그 만큼 교통소통에 불편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만한 정도도 전철화후 늘어난 숫자이다. 이전엔 화평동과 배다리 철교 그리고 부평굴다리에다 숭의육교 화평동 구름다리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철도로 인한 인천시가지의 양분은 지역간의 교류와 균형발전에 큰 장애로 등장한다. 오늘날 수인선의 지하화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시민단체 등의 주장은 그래서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만성체증의 법원 고가교와 동암 굴다리를 예로 들면 출퇴근길의 혼잡은 물론 하루종일 붐빈다. 인근에는 대단위 공단이 있는데다 두곳뿐인 철도 관통로만으로 수인산업도로 경인고속도로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경인철도로 인한 인천 동서간의 불균형 역사는 오래이다. 일인들의 독차지가 된 개항 이후 서쪽은 그들의 생활무대요 동쪽은 한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차별하던 일제하에는 그랬다 치더라도 일인들이 물러간 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동편의 화수 화평동 송현 송림동은 인천인들의 고향이었음에도 외면되었다. 여전히 서쪽이 도심의 번화가라면 동쪽은 개발이 더딘 빈약한 주거지이요 우울한 공장지대였다. 거기에다 최근에는 신개발지구로 이주가 촉진되어 낙후를 거듭하고 있다는 인상까지도 주었었다.

 오죽하면 80년대말 동구지역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경인전철의 지하화라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었다. 그 때 철도지하화는 전구간의 완전복개가 아니라도 지형에 따라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이를테면 철도 보다 지상이 높은 절개지를 복개하는 형식이었다. 예를 들어 송월동을 비롯 도원동과 숭의동 십정동의 일부지역이었다.

 마침내 남동 부평 남구지구 3개동 2천여 주민들이 법원고가교와 동암굴다리 사이의 관통로의 조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시민들이 요구하기 전에 시당국이 서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