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이 이끄는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고종이 러시아의 공관으로 피신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위 아관파천이며 한 나라의 임금이 남의 손에 의탁하는 기막힌 몰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인들에게 왕비가 살해당하는 형편이니 임금인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러파에 의해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총리대신 김홍집은 살해되고 탁지부 대신이던 어윤중은 고향땅 보은을 향해 밤을 달려 피신하는 중이었다. 여장을 하고 가마에 실려 용인땅을 빠져 나갈 무렵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알길이 없고 궁금하여 지나는 아이를 불러 그곳이 어디쯤인지를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서울서 백오십리쯤 되며 마을 이름이 어비울(魚悲鬱)이라고 했다.

 깜짝 놀라며 어윤중이 다시 어찌 쓰는 글자이냐고 묻자 고기魚에 슬플悲 답답할鬱이라고 하자 그는 더욱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교군들을 재촉 빠져 나가야겠다고 다그쳤을때 관군이 들이닥쳤으며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그러니까 고개만 넘으면 용인땅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을 고비를 못 넘긴 것이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어씨가 어비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으니 슬프고 답답한 곳을 잘못 지나간 것이라고 했다.

 훗날 순종황제가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고기가 살찌는 마을로 고쳐 부르도록 하여 오늘의 어비리(魚肥里)가 되었다. 그곳에는 오늘날 저수지가 생기고 굴지의 낚시터가 되었으니 역시 바뀐 지명대로 된 셈이다. 사연의 옛길은 지금의 45번국도이며 그리로 해서 평택을 지나 충청도로 내려가게 되는데 거기서 안성으로 빠지면 충북으로 갈 수가 있다.

 용인군 송전장이 30년만에 되살아났다고 한다. 송전장은 어비리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수몰된 위치에 있던 전통적인 장터였다. 용인군에는 송전장을 비롯 읍내 김량장 백암장 안성의 죽산장으로 이어지는 옛 장돌뱅이들의 애환이 서렸던 곳이다. 그래서 이번 송전장의 되살아남을 두고 떠돌이 상인들이 더욱 고마워 했다고 한다.

 옛것의 퇴장이 능사가 아니라 등장은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