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립박물관 '만오 홍진' 묘비 공개해
조우성 관장 "한성정부 인천 선포 역사적 의미"
▲ 1919년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13도 대표자대회를 이끈 홍진 선생 묘비가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빛을 보게 됐다. 홍진 선생 묘소는 당초 문학산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1984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 되면서 묘비를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하게 됐다. 2일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에서 직원들이 홍진선생의 묘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청년 동포여, 병든 나라 고치는 병원(病院)의 일꾼이 되자'.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만오 홍진(1877~1946)의 묘비가 2일 공개됐다.

1946년 9월9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홍진은 선영이 있던 문학산 동쪽 기슭에 묻혔다. 1984년 홍진의 묘소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되면서 묘비는 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묘비에 새겨진 이 글귀에는 독립운동가 홍진이 일제 강점으로 병든 이땅의 청년을 향한 '일갈'이자 '믿음'이 녹아 있다. 홍진이 1931년 임시정부 활동으로 중국 길림에서 머물며 한 말이다.1919년 인천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틀을 다진 한성정부 '13도 대표자 대회'를 이끈 지 12년이 지난 때였다. <인천일보 3월1일자 1·2면>

조우성 시립박물관장은 "선생 묘비에는 한성정부를 인천에서 선포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며 "13도 대표자 대회가 열린 만국공원이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사실을 알리는 노력이 인천 정체성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높이 158㎝의 묘비는 3단으로 세워졌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과 홍진의 말이 새겨진 화강암 받침대, 그리고 기단으로 이뤄진 구조다. 비석 높이는 94㎝, 너비는 45.5㎝에 이른다.

비석에는 '대한민국 28년 11월9일 건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28년'은 홍진이 세상을 떠난 1946년을 가리킨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의미다.

1877년 8월27일 서울 서소문 근처에서 태어난 홍진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인천에서 독립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법조계, 종교계 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1919년 4월2일 만국공원에 18~19명의 대표자들이 모였다. 정부 수립 의지를 담은 최초의 회합이었다. 만국공원 회합을 끝내고 중국 상하이로 떠난 홍진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까지 지냈다.

조 관장은 "당시 일제의 군수공장이 있던 인천은 다른 도시보다도 경계가 훨씬 삼엄했다"며 "만세운동과 함께 임시정부의 초석을 쌓은 역사는 인천의 결기를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홍진의 묘소는 옮겨졌지만 묘비는 여전히 인천에 남아 있다. 13도 대표자 대회가 열렸던 만국공원, 홍진이 영면했던 문학산에도 독립운동 정신이 깃들어 있다.

조 관장은 "묘비를 되살려 선생의 정신을 시민과 후손에게 전해야 한다"며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원본은 시립박물관에 보관하더라도 묘비를 복제해서 원래 자리인 문학산에 놓자"고 제안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