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임금이 장가를 드는데 폐백으로 장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신라 신문왕때이다. 김흠운의 작은 딸을 왕비로 맞기로 하고 납채를 보냈는데 폐백이 15수레요 쌀 술 기름 꿀 장 건포육 등이 135수레 조곡이 150수레였다는 것이다. 이미 삼국시대에도 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대목이다. 장은 우리 식생활중 빼놓을 수 없는 조미료이며 일찍이 콩의 산지인 만주지방에 터를 잡은 고구려에서 비롯된다.

 그런 만큼 한 집안의 장을 담그는데는 온갖 정성을 다했다. 우선 장을 담그는 계절은 봄이었다. 음력으로 3월 따듯한 봄날 특히 첫번 맞는 말날에 장을 담그면 장맛이 좋다고 여겼다. 날이 가려지면 아낙들은 사흘동안 몸조신을 했다. 문밖에 나가지도 개를 꾸짖지도 않으며 머리를 감는 등 궂은 일도 삼갔다. 독이나 항아리에 반드시 그늘진 북쪽 우물의 물을 길어다 붓고 소금을 풀어 메주를 띄웠다. 겨울철에 눈을 모아 녹인 물로 담근 장은 으뜸으로 쳐서 귀한 손님 밥상에만 놓았다.

 장독에는 숯과 고추 그리고 깨와 대추도 띄웠다. 깨와 대추는 고소한 맛과 단맛을 내기 위해서라고 하며 고추와 숯은 잡귀가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장맛이 변하는 것은 귀신이 먼저 맛을 보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숯은 잡티를 흡수하는 작용도 했다.

 이렇게 해서 담가진 장은 달여서 식힌후 독이나 항아리에 담아 부엌 밖에 두었는데 이것이 장독대이다. 부엌 뒷문을 열면 이내 장독대가 있고 그 곁에 낮은 우물이 있었다. 우리네 아낙들은 이곳을 수시로 오가며 가솔들의 입맛을 내기에 분주했었다. 장맛은 한집안의 전통이요 주부들의 자랑이었다. `장맛이 단집에 복이 든다"느니 `장맛을 보고 며느리를 안다"고 했다. `되는 집은 장맛도 달다"고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도시가정에서 장독대도 맛의 전통도 사라졌다. 간장도 된장도 김치도 사다가 먹으니 젊은주부들 장 담글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인가. 요즘 여기저기서 장담그기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