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까치야 우이야 허허/쭉지를 불고 우이야 허허/오동숲으로 우이야 허허/연해간다 우이야 허허/물묻은 쪽박에 우이야 허허/깨들어 엥기듯 우이야 허허/들어붓소 우이야 허허"-전남 영광지방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부르던 민요란다. 한 사람이 선창하면 여러 사람이 합창으로 후렴을 받았다고 한다.

 정월대보름이면 여기저기서 온마을 사람들이 나서 줄다리기를 벌였다. 남녀의 성대결로 편을 갈라 잡아다니며 승부를 결정하는데 총각들이 동쪽의 숫줄을 아낙들이 서쪽의 암줄을 잡았다. 암수의 줄을 통나무로 비녀 끼우듯 겨루는데 반드시 암줄이 승리했다. 그래야 풍년이 들었다. 그것을 미처 이해 못하는 총각들이 있으면 “아기는 여자가 낳잖아” 하며 핀잔하듯 했다.

 사실 줄다리기는 우리만의 민속이 아니다. 쌀농사권의 동남아와 중국남부 일본의 규슈지방에서도 성행한다. 원래 풍농을 기원하는 주술적 모방의례였기 때문이다. 줄은 풍우를 주관하는 용신이며 여성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관념은 생산과 연관되었다.

 지난 대보름날 휘영청 달빛 아래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에서도 줄다리기가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충동이라면 줄다리기보다 이충이란 지명에 의미가 더 크다. 이충동이란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와 성리학자 조광조가 성장한 곳이어서 명명된 이름이다. 그곳은 송탄시였던 시절 시청이 위치하는 인근이었다. 그곳에는 두 분의 충의각이 세워져 향토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두 분을 함께 모시게 된 유래는 정조임금 때로 올라간다. 진위의 유림들이 정암 선생의 집터에 유허지비를 세우려고 말에 싣고 가는데 동령마을 한 곳에 이르러 말이 울부짖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기고 알아보았더니 그곳은 오학사의 집터였다. 결국 계획을 변경 오학사를 함께 모시기로 하고 말이 머물렀던 자리에 비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동령마을은 대대로 내려오는 줄다리기를 비롯 고유민속이 많다. 그러나 우회국도의 개설 등으로 훼손일로에 있다고 한다. 소소한 것 하나라도 민속적 흔적은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