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현 인천부현동초 교사- '새끼개'
▲ <새끼개>
박기범
낮은산

문학은 언어로 된 예술이다. 문학의 하위 장르인 동화 또한 거창하게 말하자면 예술 작품의 하나이다.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아름다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 음악, 문학 작품 속에는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소설이나 동화처럼 인간의 삶을 다루는 서사 장르 속에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가 흘려 보냈을 법한 아름다움과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화의 아름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유년의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 그들의 건강한 유희정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맺는 해피엔딩에서 느낄 수 있는 안도감과 세계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들. 아마도 이런 것들이 '동화'하면 떠오르는 특징들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세계라고 해서 이처럼 긍정적이고 유쾌한 단면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여름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아이들의 삶에서 슬픔이 가진 힘을 그려낸 바 있듯 삶의 의미는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같은 대립되는 의미들이 함께 엮여져 만들어진다는 것 또한 동화가 보여주어야 하는 진실일 것이다.

<새끼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새로 사온 강아지가 너무 예뻐서 함께 놀기 위해 만지고 쓰다듬는 아이들의 손길이 어미와 떨어진 새끼 개에게는 아프기만 하다. 더운 여름 수영을 시켜주고 재미있으라고 비행기도 태워주는 아이들의 손길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가진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새끼 개는 으르렁거린다. 아이들도 새끼개의 마음과 그가 겪는 고통을 알지 못한다.

계속되는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결국 엄마는 새끼 개를 키우기를 포기한다. 다시 동물병원의 비좁은 개장에 갖힌 개는 그제서야 다시 찾아온 아이들의 엄마를 보고 반가워 짖는다. 하지만 그 반가움의 언어는 소통되지 못한다.

아이들의 엄마는 "그런데 얘는 여기에 와서도 여전히 사나워요? 보자마자 또 이렇게 짖네"라고 말하며 다른 강아지를 사서 가버린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후 개장을 청소하는 틈을 타 도망친 새끼 개는 처음으로 길 위를 마음껏 뛰어다닌다.

바깥 세상은 자유만큼이나 고생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새끼 개는 많은 사람들과 자동차 속을 내달리는 위험한 순간들을 겪었고, 연한 발에 물집이 잡힐 만큼 힘들었으며 쓰레기 봉투를 뒤질만큼 참기 힘든 배고픔도 경험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 채 떠돌던 새끼 개에게 낯익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운 마음에 새끼 개는 컹컹 짖지만 아이들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개는 반가움에 가슴이 뛰어 내달리지만 아이들에게 미처 가 닿기 전에 차에 치고 만다.

아스팔트 위에 납작하게 눌린 몸으로도 새끼 개는 마치 멀리에 있는 어딘가를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눈을 껌벅이고, 아주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꼬리를 살랑 움직인다. 그 순간 아이들은 새로 산 강아지를 안고 계단을 오르며 이야기를 나눈다.

"형아야, 그런데 우리 순돌이는 지금 어디에서 살까?"
갑자기 생각났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지. 그걸 어떻게 알아?"

쌀쌀한 초가을 저녁, 무심하고 악의 없는 아이들의 대화 너머로 싸늘하게 식어가는 작은 개 한 마리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슬픈 결말 속에서 여러 분은 어떤 감정과 생각을 하게 되는가? 그 어떤 악의없이도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줄 수 있고 그들의 관계는 영원히 소통하지 못한 채 끝날 수 있음을 슬프지만 아름답게 보여주는 이 한 편의 동화를 쌀쌀한 초가을 무렵 읽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