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8년 8월10일은 스톡홀름 시민들에게 있어 경사의 날이었다. 그들은 모두 흥분하여 부두로 향했다. 스웨덴 왕가의 명예가 걸린 거대한 군함 바사호가 출항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바사호는 구스타프이세 아돌프왕이 설계한 승무원 133명에 전투원 300명이 승선할 수 있는 규모였다. 마침내 오후 4시 요란한 예포와 시민의 환호속에 바사호는 움직여 사뿐히 항구를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나 이내 돌풍이 일고 배는 왼쪽으로 기울더니 손쓸새도 없이 순식간에 침몰하고 말았다. 그리고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후 옛 침몰선의 인양을 꿈꾸던 청년이 있었다. 그는 우선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갈고리로 바다밑을 휩쓸었으나 쓰레기나 건질뿐 이었다. 그러다가 1956년 어느날 그는 검게 변색한 오크나무 조각을 건질 수 있었다. 그것은 바사호의 한 작은 조각이었으며 그로인해 잠수부들이 33m 밑까지 내려가 바사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5년후인 1961년 부선에서 내려뜨린 강철 케이블로 묶어 배를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바사호는 오늘날 특별히 지은 스톡홀름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렇듯 확실한 근거에 의한 역사의 침몰선은 인양이 가능하다. 특히 현대과학이 발달하면서 주인공들은 깊은 바다속에서 속속 건져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타이타닉호가 생생하게 수중 촬영된바 있으며 연전엔 일본 대마도 근해에서 러일전쟁때 침몰한 러시아 함대의 수중탐사가 보도된 일도 있다. 그러고 보면 에게해에서의 호머시대 함선의 인양이 꿈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인천 앞바다 울도 인근에서 침몰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승호 인양이 보도되고 있다. 고승(高陞)호는 청일전쟁 당시 청군의 수송선으로 1,200명의 증원 병력을 싣고 아산만으로 향하던중 일군의 공격으로 격침되었었다. 이때 단 147명만이 살아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료로는 고승호에 은 2만5천냥이 실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흔히 침몰선은 보물선으로 기대되는데 역사의 인양은 사실의 규명일뿐 허황된 기대여서는 안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