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절 진정한 대한민국 자랑 '미스 동일'


30년대 亞최대 동양방적 공장
광복후 동일방직 개명 후 성장
창립기념 '미스동일대회' 개최


가을을 맞아 전국적으로 각종 축제가 봇물 터지듯 열리고 있다. 지역 축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지역 특산물이나 지역 관광 등을 홍보하기 위한 향토미인선발대회이다.

○○아가씨, ○○아줌마, 미스○○ 등 한때 전국에서 100여개의 미인대회가 열렸다. 한 대회에 보통 진·선·미 3명을 선발한다면 하루에 한 명꼴로 '미인'이 탄생했다는 계산이다. 대한민국은 가히 '미인대회 공화국'이란 비아냥을 듣기에 충분했다.

그 의미는 좀 다르지만 1960·70년대 여자 대학에서도 '메이퀸 선발대회'가 유행처럼 열렸다. 가장 유명했던 행사가 1908년 이화여대 창립기념일에 처음으로 개최된 '이대 메이퀸 선발대회'이다. 메이퀸은 첫 대회에서 설립자 스크랜톤 부인이 초대 여왕으로 선발된 이래, 1925년 이전까지는 주로 학교의 유공자나 존경받는 선생님들이 선출되었다. 이 후부터는 학생들 중에서 메이퀸이 뽑혔다.

인천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오래 전에 개최되었던 한 '미인대회'가 있다. 만석동에 있는 섬유업체 동일방직에서 개최한 '미스동일대회'이다. 동일방직은 업종상 여성들이 많이 근무했던 회사였다.

일본인들이 '동양 최대'라고 자랑한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1934년 직조기 1292대를 갖추고 조업을 시작했다. 하루 품삯이 당시로서는 높은 편인 쌀 2되 정도여서 조선인들은 이 공장에 들어가길 원했다. 개업 초기 만 13세 이상 20세까지 여성으로 약간의 일본어를 해독할 수 있는 학력 수준의 미혼자로 한정해서 모집했다.

처음 채용된 조선인 여직공은 1200명이었다.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졸업 정도였지만 일본어 구사 능력이 그리 좋지 않았다. 면직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오사카 본사에서 일본 여성 숙련공 55명이 왔으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공장 측은 일본어에 능숙한 여고보 출신을 통역사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여직공 중에는 가정에서 벗어나 나름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자 일부러 공장에 취업한 경우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인천출신 영화배우 도금봉(본명 정옥순)도 이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광복 후 동일방직으로 회사명을 바꾼 이 회사는 한때 3000명의 종업원을 둔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 내에 기숙사를 두었고 산업체 야간학교도 개설했다. 이러한 제도 도입으로 생산율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그에 따른 여직공들의 단조로운 사내 생활, 엄격한 시간 규제 등으로 이직률이 높은 편이었다.

게다가 다른 업종의 여성인력 유입과 경쟁 업체의 성장은 이직률에 한몫 했다. '70년대 인천시사'에 의하면 1978년 현재 인천 관내에는 전방(17만추), 한일방직(5만추) 등 규모가 큰 면방직공장이 있었다.

동일방직은 노무관리의 한 방편으로 사내 축제를 마련했다. 주로 창립 기념을 겸해 치러진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미스동일대회'이다. 선발 기준, 포상금 등 프로그램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인해 일 년 중 가장 관심을 갖는 이벤트였을 것이다.

분임조별, 기숙사 층별 등 자신이 속한 그룹의 대표를 '미스 동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몇날 며칠 '전략'을 짜며 함께 웃고 울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겪었을 단조로움과 무료함을 벗어 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일이었다. 산업화 시절 진정한 대한민국의 '메이퀸'은 바로 그들이었다.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