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 '대립적 구분' 위험 수준 치달아
용어 비정상성·이념갈등 증폭 등 원인 파악
'중도수렴 현상' 재조명 … 광복 70년 기획도
▲ <황해문화 2015 가을호> 새얼문화재단 400쪽, 9000원

<황해문화> 2015년 가을호(88호)가 나왔다. <황해문화> 가을호는 극단과 과잉의 시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개별 국가나 사회마다 차이가 있지만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구분이 개인이나 집단의 정치적 성향을 판별하는 데 있어서 모두가 납득할 만한 공준이 되던 시대는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이미 지나갔다. 한국사회의 경우로 좁혀보더라도 민주화 투쟁기까지는 이러한 전통적 구분들이 어느 정도 유효할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친일·친미 사대주의에 빠진 민족주의자나 자국민을 적대시하는 국가주의자, 공동체적 가치보다 시장자유를 더 부르짖는 보수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를 탄압하는 민족주의자,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민주투사, 환경운동을 무시하는 노동운동가, 북한을 혐오하는 진보인사,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인권운동가, 가부장적 환경운동가 등 언필칭 진보세력 내에서도 자기 내부의 가치혼란과 반동성(?)으로 분열되어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진보-보수', '좌파-우파'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이처럼 내적으로 해체되는 중인 데 반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 내부가 이런 철 지난 대립적 구분법이 상투화, 경직화돼 가는 상황은 우려스러운 수준을 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른바 '진보'는 진보대로 민주화 운동 단계의 낡은 현실감각에 매몰되어 '보수'를 '수꼴'이라 타자화하고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를 '종북 좌빨'로 타자화하며 상호 무매개적인 대립쌍으로 존재한다. 이를 항구화·제도화하는 이런 상황은 이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흐름은 어떤 사회적 갈등도 늘 과잉대립 상태로 만들고 올바른 의제와 경로의 설정을 방해한다. 현실 속에서 가능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전개되고 있는 문제해결의 과정과 그 과정에 복무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노력을 무화하는 결과를 빚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2008년부터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의 지배과정에서 진보 일반에 대한 무차별적 박해와 차별이 노골적으로 전면화한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자유주의적 견해들조차 매카시즘적으로 매도돼온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진보 일반'의 대응 역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문제는 여전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황해문화> 가을호는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난제 중의 하나인 진보-보수(좌-우) 이분법의 '준제도화'와 그 폐해를 짚어본다. 그것이 과연 극복 가능한 것인지, 그렇다면 그 경로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탐색해보고 있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서

먼저 특집 총론에 해당하는 김진석 교수(인하대 철학과 교수)의 '왜 중도를 두려워하는가'는 한국사회에서의 진보-보수 용어의 비정상성과 진보-보수의 적대적 공생관계와 특히 '진보진영' 쪽의 '진보' 집착이 지닌 허위의식적 성격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민주당과 좌파를 한 묶음으로 진보로 지칭함으로써 자유주의와 좌파 사이를 차이를 무화시키고, 또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한 묶음으로 취급해온 광의의 진보세력들의 지적·도덕적 허영심과 우월감, 배타성, 그리고 그 안에 숨은 무능과 무책임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이 지점에서 진보의 이름으로 진보를 비판하는 순환논법 대신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중도'를 호출한다. 보수-진보의 진영논리를 넘어서고, 중도와 진보(또는 좌파)를 제대로 구별하는 것과 병행하여 '적극적 중도', 혹은 '복잡성의 중도'를 하나의 실천적 대안으로 내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는 중도가 아니라 단순함을 거부하고 기존의 보수-진보의 관점에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사태의 복잡성을 직시하며 상황에 따라 투쟁과 타협을 마다하지 않는, 강자의 권위에 굴종하지도 않고 약자에 대한 과장된 정의감에도 휘둘리지 않는 중도라고 규정한다.

윤성이 교수(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무엇이 이념 갈등을 증폭시키는가'는 구체적인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이념 갈등의 심각성과 그 원인들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은 냉전이데올로기 차원, 시장경제에 대한 태도의 차원, 또 사회적 가치판단의 차원 등 서로 성격이 다른 세 차원에 걸쳐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들이 구분되지 않고 착종된 채로 전개되는데다가 계층·계급갈등뿐만 아니라 세대 및 지역 갈등과 중첩되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고 본다.

실제 조사를 통해 보면, 이를테면 새누리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간의 일반적 이념 격차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데 두 정당 간의 정파적 대립은 점점 극대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며 특히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그 차이가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이념 갈등의 한국적 특징들은 집단문화와 획일·집중의 정치구조, 제왕적 대통령제, 정책 중심이 아닌 사익 우선과 감성 중심의 정당체제, 시민세력과 언론에 의한 이념 갈등 증폭, 온라인 공간의 양극화 등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고착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한다.

채진원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중도수렴의 확대 경향성과 그 과제'는 최근 새누리-새정치 양당 대표들(유승민-문재인)의 중도층 획득을 위한 '좌클릭'과 '우클릭'에서 진보와 보수가 상호 침투해 서로 교집합을 넓혀 융합하는 '중도수렴' 현상을 확인한다.

이것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경향적인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 배경 및 효과, 그리고 향후의 과제를 논한다.

그는 이러한 중도수렴 현상이 지난 18대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의 등장에 의해 강제됨으로써 시작됐으며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사회적 저항, 정치적 이념 양극화 현상에 대한 불신,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과두화 및 그로 인한 절대다수 구성원에 대한 대표성의 상실 등이 이러한 중도수렴의 경향성을 구체화·심화시키고 있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중도수렴 현상은 양당 지지자들의 이념적 양극화가 둔화되고 있는 현재의 우리 상황에서는 정당간의 대화와 타협, 숙의의 활성화로 안정적 국정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공화국의 정체와 정신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확장에 기초한 중산층의 회복, 유연한 네트워크형 정당모델의 창출,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선과 균형안보외교노선 및 식민지·냉전체제 유산 청산,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 등을 통한 실용적·실사구시적 가치와 정책수립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끝으로 김기협 선생(역사학자, 전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해방기 중간파 노선의 재인식'은 1945~1948년 해방정국에서 극좌와 극우의 대립 속에서 당대의 여론과 추세에 따라 좌익 공산주의도 우익 자본주의도 아닌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해 통일된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여운형, 안재홍, 김규식, 백남운, 원세훈, 김병로 등의 입장과 활동을 전후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으나 중간파와 합작의 힘으로 영세중립을 쟁취한 오스트리아의 경우와 비교하여 자세히 조명한다.

이것이 외세와 국내의 극좌·극우파들에 의해 좌절되었음을 다시금 환기시켜주고 있다. 그는 나아가 이 시기 중간파가 좌절한 이후 전쟁과 분단, 남북의 대결 속의 적대적 공생,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의 보수야당의 저항논리 독점 등에 의해 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기축으로 하는 중간파 노선이 한국사회에서 힘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광복 70년, 한일협정 50년 '두 문제국가 사이에서'

올해는 광복 70년, 한일협정 50년이 되는 해로 <황해문화>에선 한일관계와 관련한 연속기획도 만날 수 있다.

'해방 70년, 한일협정 50년-두 문제국가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식민-피식민의 경험에서 시작해 냉전체제, 전쟁, 분단 등 요동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통과하면서 각자 독특한 국가체제를 지속시켜온 두 나라의 오늘을 가해-피해의 수직적 프레임이 아니라 두 개의 문제국가라는 병렬적 프레임 속에서 다시 살펴본다.

이 기획은 식민과 피식민의 기억과 표상(2015년 가을, 88호), 천황제와 국가보안법체제라는 강제된 국가형식(2015년 겨울, 89호), 두 나라 시민(민중)의 갈등과 고통,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2016년 봄, 90호)이라는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 볼 예정이다.

이번 호에서 세 편의 소설도 만난다. 노장 김원일 선생의 비극적 현대사를 몸으로 겪어오신 당신의 조모에 대한 기억을 차분히 회고하는 단편 <기다린 세월>, 근 20년 만에 다시 소설 쓰기의 길로 돌아온 정화진의 단편 <두리번거리다>, 그리고 2014년 실천문학 신인상 출신의 신인 최승린의 단편 <비너스 오피스텔> 등은 모처럼 깊고 풍성한 소설 읽기의 맛을 보여준다. 400쪽, 9000원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