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권 이전·개발사업 취소 … 사람들 기억서 멀어지다
▲ 1959년 인천시 서곶출장소 공무원들이 작약도로 소풍 겸 당일 피서를 다녀왔다. 양은그릇과 댓병소주 몇 병을 챙겨들고 만석부두에서 배를 탔다. 바위에 걸린 물고기는 현지에서 잡은 건지 아니면 안주로 챙겨간 것인지 궁금하다.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심현빈씨

인천에는 168개의 섬이 있다. 인천시는 섬마다의 특색을 살려 바다 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작약도는 해양관광지 개발을 이야기 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섬이다.

일제강점기 작약도는 일본인 스즈키 하사오 개인 소유였기 때문에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956년 서울 영등포에 있던 밀가루 회사 동립산업이 경기도로 부터 이 섬을 140만원에 사들였다. 섬에 있는 5만 그루 소나무만 해도 1500만원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 돈에 불하된 것은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다는 등 여론이 들끓었다. 무인도 작약도가 세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이 섬은 한바탕 보물찾기 소동에 휩싸인다. '섬 소유주 스즈키가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갈 때 3억 환어치의 금괴를 가져갈 수 없게 되자 섬 한구석에 해골과 함께 급히 파묻고 갔다'는 어느 일본인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엄동설한에 발굴 소동이 한바탕 벌어졌다.

외부인의 출입 금지는 물론 어선조차 접근 못하게 삼엄한 경비를 펼친 가운데 극비리에 지질학자 등 전문가와 인부들만 섬에 들어갔다. 철야 작업을 하며 불도저로 이곳저곳을 파헤쳤지만 해골만 몇 기 나왔다. 금괴는 얻지 못하고 섬만 골병들게 했다.

1963년 1월1일자로 이 섬은 부천군에서 인천시로 편입되었다. 때마침 한강에서 수영이 금지되자 많은 서울 사람들이 경인지역의 유일한 해양관광지 작약도로 몰려들었다. 동인천경찰서는 해수욕 시즌 마다 한동안 이 섬에 일종의 여름파출소인 '서비스센터'를 개설하기도 했다. 정·사복 경찰관을 상주시켜 불량배, 수배자, 음주 수영객을 단속하고 확성기로 일기예보와 선박 안내도 했다.

인천시에서 발행한 '1969년도 시정백서'에는 당시 인천의 관광지로 송도유원지, 작약도, 약사암, 문학동약수터, 월미도유원지가 게재되었다. 연간 방문객수는 송도유원지 30만 명, 작약도 3만5천명, 월미도유원지 2만5천명 순이었다.

작약도의 주요 관광 대상물로는 등대와 울창한 수목을, 주요 시설은 해수욕장, 호텔, 막걸리홀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기(誤記)인 듯하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아주 작은 백사장이 있었기 때문에 해수욕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텔 시설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호텔커녕 여인숙 한 채도 없었다.

동립산업의 부도로 73년 작약도는 경매시장에 나왔다. 7만2700㎡(2만2천여 평) 크기의 이 섬은 3년 후 1억1342만원에 한보개발로 넘어갔다.

쾌속관광선 2척을 운항한 덕에 여름철 하루 적게는 5000명 많게는 1만명이 섬으로 들어왔다. 인천 사람치고 소싯적에 작약도에 한번 놀러가 보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였다.

행락객이 많다보니 한보는 불법으로 입장료를 징수하고 무허가 방갈로와 음식점을 운영하는 등 탈법을 저질렀다.

게다가 섬에 설치된 10여개 화장실의 인분을 10년 넘게 바닷물이 가장 높아지는 만조시각을 이용해 2, 3개월에 한 번씩 바다로 흘려보냈다. 그야말로 인천앞바다를 '똥바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후 유원지사업 허가 취소 등 인천시와의 법정 분쟁으로 장기간 방치되다가 섬은 ㈜원광으로 소유권이 바뀌었다. 원광은 민자를 유치해 2001년 까지 영종도에서 작약도를 연결하는 리프트 설치, 100여실 규모의 호텔을 비롯해 카페촌, 전망대, 해상박물관 등을 조성하는 국내 최대의 해상관광단지 개발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개발안은 한 뼘도 진척되지 못했고 섬은 2005년 다시 진성토건으로 넘어갔다.

이후 작약도는 청사진만 몇 장 더 그려지고 뱃길마저 닫히면서 행락객의 발걸음이 완전히 끊어진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작약도는 아주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섬이 되었다.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