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 바닷가 넓고 평평한 바위…배 정박하던 곳 '조선 문집'에 등장
[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 '광여도'에 나타나는 태평루.

안민학(安敏學, 1542~160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풍애(楓崖)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25세에 박순(朴淳, 1523~1589)에게 나아가 사제관계를 맺은 뒤 이이(李珥, 1536~1584)와 정철(鄭澈, 1536~1593) 등과 교유했다. 1580년(선조 13), 이이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됐다. 1583년 외직으로 나아가 대흥(大興)·아산·현풍·태인 등지의 현감을 역임했다. 문집으로 <풍애집(楓崖集)>이 있다.

<아산창에서 미곡선을 타고 서울로 가다가 밤에 자연도에 배를 대다(自牙山倉乘米船赴上游夜泊紫燕島)>
孤舟萬里楚臣同(고주만리초신동)
외로운 배 만 리를 떠도니 초나라 신하와 같고
日暮煙波思不窮(일모연파사불궁)
해 저물어 안개와 파도 일자 생각이 끝이 없네
明月滿天滄海靜(명월만천창해정)
맑은 달빛 하늘 가득하고 바다는 고요한데
水禽驚叫五更風(수금경규오경풍)
물새는 새벽 바람에 놀라 우네

작자는 아산의 창고에서 서울의 창고(京倉. 경창)로 조세미를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아산 창고를 출발한 세곡선은 바람과 조류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작자는 자신의 옛모습을 떠올렸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經)·사(史)·백가(百家)를 널리 섭렵했고 20세에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천거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 위로 초나라 굴원(屈原, BC 343~BC 278)의 고사가 겹쳐졌다.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던 굴원은 중상모략으로 추방돼, 강남을 떠돌다가 멱라수(汨羅水)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어부사(漁父辭)>에는 굴원과 노인 어부의 대화가 기술돼 있는데, 노인 어부는 굴원에게 세상에 순응하라고 권하지만 굴원은 이를 거부한다는 내용이다.

해 떨어지자, 세곡선은 자연도(영종도)에서 하루 묵어야 했다. 바다 안개와 파도가 뱃전을 두드릴 무렵,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과 굴원의 처지를 오버랩(overlap)시켰던 조금 전의 상황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벼슬을 하고 있는 처지에서, 세상에 순응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한데 엉겨 있었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눈에 포착된 광경은 조화로웠다. 둥근달이 맑게 떠서 하늘과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파도가 잦아든 잔잔한 바다는 물고기 비늘인양 달빛을 반사시켰다. 그런 조화로움을 깨뜨린 것은 물새의 울음 소리였다. 작자는 다시 조금 전의 상황으로 돌아왔다.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호곡(壺谷)이다. 1646년(인조 24) 진사가 되고 164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병조좌랑·홍문관부수찬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1655년(효종 6) 통신사로 일본에 갔는데, 관백(關白)의 원당(願堂)에 절하기를 거절해 여러 차례 협박을 받았지만 거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현종 때는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 이외의 모든 참판을 역임했으며, 외직으로 경상·경기감사를 맡기도 했다. 문집으로 <호곡집(壺谷集)>이 있다.

<자연도에서 취하여 계양 사군 정시형에게 주다(紫燕島醉贈桂陽鄭使君時亨)>
春波二月鏡開函(춘파이월경개함)
2월 봄 물결 거울함을 열은 듯하고
裊裊東風滿一帆(뇨뇨동풍만일범)
간드러진 동풍 돛에 가득하네
何處故人來待我(하처고인래대아)
다정한 벗 어느 곳에 와서 나를 기다리나
早潮初退太平巖(조조초퇴태평암)
아침 썰물 물러난 태평암일 텐데

작자는 자연도 태평암을 향하고 있다. 바다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적당해 배를 운항하기에 알맞다. 배가 향하는 곳은 자연도의 태평암인데, 그곳에는 친구 정시형(鄭時亨, 1619~1699)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당시 정시형은 계양의 사군(使君)으로 와 있었는데, 작자를 만나러 자연도에 미리 와 있었다. 태평암 인근에 객관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회포를 풀었을 것이다.

태평암은 중산동 구읍나루터 동쪽 바닷가에 있었던 넓고 평평한 바위이다. 자연도(영종도)의 대표적 경관지였기에 그 옆에는 태평루와 객사(客舍)가 세워져 있었다. 남용익이 향하던 곳이나 서울로 향하던 안민학이 배를 정박한 데는 태평암이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