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개척·역동적 활동 … '최초' 칭호 多
[인천 정체성 찾기] (45)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미추홀로부터 2030년, 인천정명600년의 인천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인천은 개척지이자 선구지 공간이었고, 개척정신이 역사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다.

인천 여성의 역사도 이러한 개척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최초의 박사, 최초의 학사, 최초의 배우, 최초의 아나운서 등 유달리 최초에 해당하는 여성이 많이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인류의 절반, 여성

지금까지와는 다른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 중의 하나가 여성사다. 여성사가 대두한 것은 여성운동의 전개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서양의 경우 여성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이다.

▲ 이옥경
이 무렵 각국에서는 여성 참정권운동이 일어나 교육·직업·정치와 같은 기본적인 시민권의 불평등을 시정하려 했다. 이러한 여성운동은 여성불평등의 원인을 찾아 과거로 눈을 돌리게 했고 이것이 여성사가 등장하게 된 원인이 됐다.

우리의 경우도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서술된 이능화(李能和)의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1927) 이래 나름의 연구를 축적하였고, 70년대에 대학에 여성학이 도입된 이후, 80년대 여성운동과 함께 발전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여성사 연구의 진전은 역시 역사학계의 변화와 관련돼 나타났는데, 기존의 정치사 중심에서 탈피해 다양한 형태의 사회사를 모색하는 방향에서 생활, 풍속, 심성 등 여러 분야가 의미를 갖게 됐고 여성을 역사연구의 주제로 삼는 것도 가능해졌다.

전통사회와 인천 여성

그간 발굴 정리된 역사 속 인천 여성인물은 319명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시대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전근대시기 찾아지는 인천 여성인물은 143명이지만 활동의 범주도 사례도 제한적이고 주로 지배층인 왕실이나 사대부계층과 관련돼 있다. 고려시대 왕실의 외척을 이루었던 인주이씨가의 왕비들,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국난에 처했을 때 양반가 여성들의 순절 사례를 통해 그 활동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조선시대 유교 통치이데올로기 속에 가부장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재가금지, 칠거지악, 삼종지도, 내외법 등을 통해 여성들의 활동은 규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신분별로는 거의 양반사족의 부녀자들 사례가 많고 서민, 노비, 양반의 첩 등이 부분적으로 찾아진다. 그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효녀, 열녀, 절부의 사례가 대다수다. 병든 어머니를 소생시키기 위해 단지(斷指)하거나, 가묘(家廟)와 사당을 불속에서 지키기 위해 신주를 안고 죽음을 맞이한 사례 등이다. 또 열녀와 절부의 경우는 이윤생부인 강씨처럼 대개 남편이 죽으면 함께 자결하거나 종신토록 고기 등 맛난 음식을 먹지 않았다. 또 순조 때 판서를 지낸 충민공 민성閔垶) 집안의 여인들처럼 변란을 당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한 집안의 여성 13명이 모두 자결하는 사례 등으로 나타나
시대를 개척했던 역동적 인천 여성
근대사회로 들어서면서 천주교, 기독교, 동학이나 개화사상에서 제시되는 남녀평등관과 근대여성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여성들의 의식과 지적 능력이 신장돼 여성의 활동이 다양해진다. 근현대시기에 찾아지는 역사 속 인천 여성인물은 176명인데, 그 활동의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 박창례
<교육과 종교>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물은 대다수가 기독교 교인이거나 교회를 통해 근대식 교육을 받고 주로 영화학당이나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했던 여성들로 김애식, 서은숙, 김애마, 김영의, 김활란, 박창례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김애식, 서은숙, 김애마, 김영의, 김활란은 인천출신으로 영화학당, 이화여전을 거친 공통점을 가졌다. 이들 중 김활란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박사로 알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 친일행적 때문에 세간에 회자되고 있어 안타까운 부분이다.

박창례는 창영학교를 마치고 서울 정신여학교에 진학했었는데, 인천으로 돌아와 성냥공장과 정미소 노동자들을 모아 노동 야학인 '관서학원'을 열었다.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을 거듭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동명학원의 기초를 다졌던 인물이다.

<사회 및 독립운동> 분야에서는 하란사, 조봉암의 부인 김조이, 한글 점자를 개발했던 박두성의 부인 김경내, 여성운동가이자 인천 최초로 신식 결혼식을 올렸던 안인애 등이 있다. 인천출신은 아니었지만 시집을 왔거나 인천에 연고를 두고 생활했던 인물들로 그들에게는 사회운동이 곧 독립운동이었고, 동시에 여성운동이기도 했다.

▲ 하란사
하란사는 인천 감리를 지낸 하상기의 부인으로 남편 성을 따서 하란사라 했다. 이화학당에 다니다 1896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 유학해 1900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 학사학위 취득자이자, 첫 자비 유학생으로 알려져 있다. 1906년부터 이화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여성계 지도자로 활약했다. 한글 점자 창안자 박두성의 아내 김경내는 경기도 화성 출신이지만, 한글 점자 창안자 박두성을 만나 남편이 한글 점자 개발과 맹아 교육에 전념하도록 뒷바라지했고 부인회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 최초의 여배우 복혜숙, 권번출신 민요가수 이화자 등이 있다. 이옥경은 인천고등여학교 한국인 첫 졸업생이기도 했다. 일본 동경의 일본여자음악학교에서 수학했고, 1927년에 개국한 경성방송국의 한국 최초 여성 아나운서가 됐다. 이옥경의 차녀 노라노(본명 盧明子)는 한국 최초의 여성 패션디자이너로서 우리나라 복식 문화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여성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극 여배우인 복혜숙은 충청남도 대천 출생이지만,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인천 권번에 3년간 체류하면서 기예 활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화자는 부평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의 애환을 노래로 달래주었던 민요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 속 여성, 인천 가치 창조의 자원

인천만의 가치를 재창조 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그 원천 자료는 2030년이 넘는 오랜 인천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사회의 유교질서 속에 규제된 전근대, 그리고 혼돈과 변화를 거듭하던 근현대 사회를 살아왔던 인천 여성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또 하나의 인천 가치 창출일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을 사는 인천 여성의 정신적 근원은 바로 이들의 '도전적 개척정신'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