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종 인천학생 6·25참전관 운영


16살 6·25 참전용사 … 아들과 함께 기념 사업
사비들여 300여명 발굴 인터뷰·사진 등 보관
"8월 참전관 이전하며 정식 박물관 등록할 것"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지난 6일은 현충일이었고, 오는 25일은 6·25전쟁 65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전쟁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그 날의 참혹함을 되새기며 다시는 이땅에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다. 나아가 전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는 25일 6·25전쟁 65주년을 앞두고 인천학생 6·25참전관을 운영 중인 이경종(82) 옹을 만났다. 이 옹은 마침 오는 8월 인천학생 6·25참전관을 이전하며 정식박물관으로 등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벌써 65년 전 일이 됐네. 이젠 기력도 떨어지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것 같아. 그렇지만 그 때의 그 차가운 눈보라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이경종 옹의 회상어린 눈빛에 알 수 없는 회한이 어려 있었다.

세찬 겨울의 칼바람이 불던 1950년 12월18일. 그는 두 살 터울의 형인 이기종씨와 인천축현국민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겨울바람 끝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였다. 운동장엔 수천명의 학생들이 모여 국군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16살의 이경종은 친형, 동네 형들과 함께 안양 수원을 거쳐 부산으로의 행군을 시작한다. 부산에 닿은 것은 20일이 지나서였다.

"형과 나는 엄니가 사 준 커다란 군복을 입고 함께 전쟁에 참여하기로 한 거지. 그 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우리 쪽이 밀리기 시작했거든. 한 3000명 쯤 내려간 것 같아."

그렇게 부산까지 내려갔지만 그는 군번을 받지 못 한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탈영병 군번을 받아 4년 간 전쟁을 치른다. 그렇게 19살이 되던 해인 1953년 그는 진짜 군번을 부여받는다. 이후 2년을 더 복무한 뒤 청년의 모습으로 귀향한다.

"집에 와 보니 내 친구들은 다 대학에 다니고 있더라구. 그런 친구들을 보며 부럽기도 했지만 도저히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

전쟁에 참여하느라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 이경종은 이후 막노동은 물론이고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만큼은 아니었지만 전후의 인천은 먹고 살기가 전쟁터 만큼이나 힘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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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종(82) 옹

'향로봉 전투'에서 고꾸라지는 바람에 허리가 좋지 않았지만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먹고 사는 일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7살때 동갑내기 아내 김동숙(82)씨를 만난다. 아내는 만주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었다.

"집사람은 광복 뒤에 인천으로 와서 방직회사를 다니고 있었어. 그런데 중매로 나를 만나게 된 거지."

그렇게 아내와의 사이에서 규원, 용훈, 호인 아들 3형제를 낳고 열심히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키우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없는 형편에 세 아들을 공부시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들 규원(현 이규원 치과의원 원장)이 말했다.

"아부지, 나 인천기계공고 갈래요."

이 옹이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런거니?"

"빨리 졸업해, 돈 벌어서 아부지 갖다 드릴려구요."

한참동안 큰 아들을 바라보던 이 옹이 말했다.

"넌 공부를 잘 하잖아. 3년 뒤에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인문계로 진학해라."

결국 큰 아들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부평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당시 부고는 수재들만 모이는 학교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큰 아들은 경희대학교 치과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이후 줄곧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고 최고의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다.

"당시 아들은 차비를 아끼려고 여기서 부평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어. 그래도 공부를 잘 해서 다행이었지."

지금의 인천학생 6·25참전관을 설립한 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해 치과의원을 차린 아들의 효심에서였다.

"어느 날 아들과 얘기를 나누는데, 내가 6·25전쟁에 참전했던 얘기를 해줬어.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학생들에게 누구고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그랬더니 규원이가 그러더라구. 아부지 저하고 같이 기념사업을 하시죠."

그렇게 만든 것인 '인천학생 6·25참전관'이었다.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설립한 이 기념관엔 6·25전쟁과 관련한 많은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이 옹이 일일이 다니면서 300명의 학도병을 발굴해 인터뷰한 내용과 사진이 많이 눈에 띈다. 지난 2007년부터는 <인천학생 6·25참전사>를 펴내오고 있기도 하다.

"그 때 그냥 아들이 아 그러세요. 하고 지나갔으면 아무 것도 없을 거야. 그런데 저렇게 치과를 하면서 아버지의 원을 들어주고, 전쟁에서 희생된 넋들의 한을 풀어주고 있으니 내 아들이지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인천학생 6·25참전관은 오는 8월 지금의 자리 건너편으로 이전한다. 규모가 커 지기 때문에 시험을 통해 학예사 자격증을 가진 전문학예사도 채용했다.

"나는 그래도 살아있지만 많은 학도병들이 어린 나이에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간 경우가 많아. 정식군인이 아니고 학생이다보니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거야. 그런데 나라에서도, 인천시에서도 학도병들에겐 관심을 주지 않잖아. 학도병들에 대한 기록만 제대로 해 놓아도 나라사랑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텐데, 지금 6·25가 뭔지도 모르는 학생이 엄청 많다고 하던데."

65년 전, 코 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16살 소년이 어느 덧,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기자와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던 이 옹이 참전관에 나가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