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광(동양탄소(주) 고문)

 

자유시장엔 한국 술.과자도 팔아

98년 7월13일

 오후 2시10분에 맞은편 언덕에 있는 메리힌촐로(거북이라는 뜻) 돌거북을 보러 갔다. 이 돌거북도 비석의 대좌이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원의 땅은 사질(砂質)이나 비는 땅에 스며들지 않고 그대로 흘러 계곡은 금방 개울로 변해 버렸다.

 근처에 있는 2m 크기의 남근상(男根像)을 보러 갔다. 하르호린이 한창 번성하고 있을 때 라마승들의 성 문란이 사회적인 큰 문제로 등장했다. 그리하여 여성의 음부처럼 생긴 골짜기를 향해 이 남근상이 세워졌다. 이 남근상을 세운후 라마승들의 성 문란은 수그러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자유시장을 「자하」라고 하는데 가 보기로 했다. 외국상품도 많았는데 월남제 과자, 터키제 초콜릿, 미국 담배도 있고 우리 나라 것은 럭키민트, 초코파이, 오 예스와 OB의 카프리도 있었다. 이곳에서 지난 11일 잡은 양의 가죽을 ₩8,400에 팔았다. 양 값이 ₩2,800이였는데 가죽값이 ₩8,400이었다. 우리들은 술과 식량을 이 곳 「자하」에서 구입했다.

 오후 3시20분에 오르혼 강가로 가서 점심을 해먹었다. 또 이도 닦고 오래간만에 머리도 감았다. 오르혼강은 하르호린을 관통하는 강이다. 우리의 가이드인 인민가수 톱신 자르갈은 문화사절로 우리나라에 5회, 북한에 3회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북한 사람들은 말과 같다고 말했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한다는 뜻이다. 그는 제주도에도 오래 있었기에 혜은이의 감수광을 멋지게 부른다. 어제도 오늘도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아리랑, 감수광을 여러번 불렀으며 자기 히트송을 비롯한 몽골노래를 부르면서 운전했다.

 비 내리는 하르호린을 떠나 항가이 산맥을 따라 또 서쪽으로 달렸다. 이 길이야 말로 칭기즈칸의 대군이 서쪽으로 진군했던 길이다. 오후 4시50분에 「차강숨」(백색 화살이라는 뜻^고도 1천5백95m)강을 건너 밤 9시30분에 타미르강에 도달했다. 이 부근 강가에는 올리아스태나무(백양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우리 차는 밤 9시50분에 작은 개울(고도 1천7백40m)에 빠져 버렸다. 비가 오는데도 아직 훤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자동차의 뒷부분이 개울언덕에 올라앉아 버렸다. 바퀴마다 돌을 깔고 근처의 겔에서 삽을 빌려서 차 뒤쪽의 흙을 파냈다. 마침 버스 두 대가 따라왔기에 여럿이 밀어주어 무사히 개울에서 빠져 나왔다. 삽을 돌려주고 고맙다고 인사하니 겔 주인의 아버지가 밤도 늦었는데 여관을 찾느니 우리집에 가자고 하기에 우리들은 이 노인집으로 따라갔다. 이 노인은 소두놈^찬치(59세)라는 빵공장 공장장이었고 오늘 나담 축제에 갔다 오는 길에 아들집에 들렀다고 한다. 그의 가슴에는 산업훈장이 달려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 또 술인사와 코담배 인사가 시작됐다. 우리들도 술 한 병을 선물했다. 몽골의 풍습에서는 손님도 술 선물을 하는 습관이 있다. 그는 옥으로 된 코담배병의 조작(彫刻)을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까지 술인사는 철저하게 연령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집에서는 시계 방향으로 술인사가 진행되어 의아해 하니 태양이 도는 방향인 시계 방향으로 하는 때도 있다고 박원길 박사가 설명해준다. 우리들은 술도 마시고 오래간 만에 빵도 실컷 먹었다.

 식사후 열린음악회가 열렸다. 톱신 자르갈이 많이 부르고 주인도 불렀다. 나는 그 주인이 노래 부를때 남아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과 닮았다고 느꼈다. 초저녁에는 열심히 듣고 있던 손자중 어린 아이들은 하나 둘씩 여기 저기서 자고 있다.

 잠자리는 침대에서는 연장자인 김봉완 사장과 내가 자고 바닥에서는 집주인, 박원길 박사, 톱신 자르갈, 어르든네가 잤는데 집주인은 손님을 내버려 두고 따로 잘 수 없다며 같이 잤다. 98년 7월14일

 아침에 일어나니 자동차 휘발유 탱크가 새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휘발유 탱크 아래 땅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어제 저녁 개울에 빠졌을 때 휘발유 탱크가 손상되었던 것 같았다.

 이 곳은 체체르레크시로 아르항가이성의 성청(도청) 소재지인데도 자동차를 수리할 공장이 없다고 한다. 아직 여행을 끝내려면 앞으로 8일이나 남았는데 어쩌나 하다 차를 이 곳에 두고 소련 군용지프차를 한 대 구해 보기로 했으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던 차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부근에 사는 사람이 세탁비누, 마분지와 두꺼운 스폰지로 휘발유가 새는 것을 막아주었다. 비누를 이겨서 마분지에 바르고 스폰지를 댄 다음 휘발유탱크 커버로 꼭 눌렀다.

 처음에는 이것으로 과연 휘발유가 새는 것이 막아질까 하고 반신반의 했으나 그후 7월23일까지 9일간 견디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해방후 이와 같이 수리한 때가 있었음을 상기했다.

 오전 11시45분 자연사박물관에 갔는데 잘 정리하여 전시되어 있었다. 몽골에 유학온 일본인 학생들이 뒤따라 왔기에 일본어로 말을 걸었더니 매우 놀라워하며 우리들의 여정을 물었다.

 서진하여 올리아스태시까지 간 다음 북상하여 바이칼호 부근의 헙스골호까지 올라갔다, 울란 바이타르로 돌아간다고 하니 몹시 놀란다. 사실 이번 우리들의 여정은 자동차로는 한국사람이 아직 한 사람도 와 보지 못한 곳이라고 박원길 박사가 설명해 주었다.

 오전 12시40분 아르항가이 아이마크 박물관에 갔으나 문이 닫혀 있고 서양 젊은이들 여섯명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박물관은 유명한 보가트 비문이 있는 곳으로 처음 온 박원길 박사가 그냥 지나갈 리 없었다.

 우리의 가이드 톱신 자르갈은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다. 그는 성장(省長)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청했다. 성장이 시립박물관장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북경으로 출장중이었다. 그래서 대학생인 그의 딸이 열쇠를 갖고 달려왔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유명한 보가트 비문이 새겨진 비석을 볼 수 있었다. 서양 젊은이들은 못보고 떠나버렸다.

 이 보가트 비문은 유목국(遊牧國)에 불교가 어떻게 전래되었는지 설명한 것으로 비문은 소그드(Sogud) 문자로 씌어,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말했다. 사원을 세워라!」 하늘이 이떻게 계시했으니 사원(불교)을 세워야 하겠다고 하여 불교사원을 처음 세웠다. 이 사람은 「마긴^테긴」이라는 사람으로 교묘하게 샤머니즘을 이용하여 불교를 몽골에 들어오게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비문에 써 있었던 것이다. 보가트 비석 옆에 또 다른 비석(사슴돌)도 있었다. 이것은 아직 비석의 내용이 해석되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