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배 인천시GCF협력팀
▲ 김성배 인천시GCF협력팀

드디어 또 한권(강신주, <감정수업>)의 철학읽기를 마무리했다. 지난해 8월부터 격주 수요일에 사람들과 함께 읽었으니까 꼬박 10개월을 이 책과 함께 보낸 셈이다. 분명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이라는 부제에 마음이 끌렸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데카르트나 칸트의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이성을 그리고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이해하는 길로 들어설 것이라 생각했다. 이 전에 같이 공부했던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강의한 이진경의 해설서 <노마디즘>처럼.

그러나 이 책은 우리의 이런 기대를 배신하고 있다. 즉, 스터디까지 해 가며 읽을 책은 아니었다. 굳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서로의 생각을 더하고 빼는 노력을 하며 읽을 만큼 철학적 깊이를 요구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정작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처음부터 저자와 편집자의 기획에는 이 부분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짤막한 인용이 있을 뿐이었다. 부제와 에필로그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한 것은 저자 그리고 편집자가 이 책을 구상하게 된 하나의 모티프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뭐하나 건질 것 없는 그냥 가볍기만 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감정을 억압의 대상으로 여기며 이성 중심의 사상체계에 익숙한 우리에게 감정에 대해 생각거리를 하나씩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흔 여덟 개의 감정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다. 막상 마흔 여덟 개의 감정을 하나씩 사유하면서 우리의 감정이 이렇게 다양한가 하는 생각도 새삼 들곤 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 감정의 수만큼 문학작품들을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의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보내고 일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감정은 억압의 대상이 된다. 최대한 개인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교묘히 숨기는 것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고 처세술이기도 하다. 서툰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건 결국 손해라고 알고 있다.

또 감수성을 주변에 보이는 일은 자칫 나약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적자생존의 정글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것조차 세게 보여야 한다. 그래야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각자가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들어내지 않는 또는 들어낼 수 없는 환경에서 관계맺음이란 그냥 막막하고 덧없이 겉돌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그 관계가 미더울 리 없고 삶이 건강할 수 없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고 각자의 삶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의 운용에서 이성의 무게를 상당부분 내려놓고 억눌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답을 찾으면 어떨까.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표현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타인의 그것을 잘 받아드리는 훈련을 한다면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일 게다. 개인에 따라서는 꾸준한 노력으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궁극에는 사회전체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각자의 감정을 드러내고 타인에게 전달하고 서로 수용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정에 대해 알아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감정의 무한한 확산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은 이성의 파트너로서 감정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감정을 그냥 억압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고 그 가치를 수용하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이성과 감정을 이분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성적이면서 감정적일 수 있고 어느 한쪽의 깊이만큼 다른 한쪽의 깊이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그 지점까지 내려가야 공감을 얘기하고 소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욕망하자. 감정과 이성의 공존을. /김성배 인천시GCF협력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