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40>정도전과 인천 관아(官衙)
▲ 인주 신 사군의 임정에서 쓰다(題仁州申使君林亭).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다. 성리학적 새로운 왕조를 설계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었던 만큼 정적(政敵)이 많았다.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정적의 칼에 단죄되었다가 조선 왕조의 후기에 이르러 겨우 복권(復權)되었다.
 
 <인주 신 사군의 임정에서 쓰다(題仁州申使君林亭)>
 古郡蕭條傍海山(고군소조방해산) 바닷가 산기슭의 옛 고을은 쓸쓸하기만 한데
 來尋陶令共怡顔(내심도령공이안) 도연명을 찾아오니 서로 얼굴을 펼 수 있네
 爲攀凉樹穿林下(위반량수천림하) 서늘한 나무 부여잡고 숲 밑을 뚫고 가니
 忽有幽花翳草間(홀유유화예초간) 문득 풀숲 사이에 꽃이 가려있네
 吏退訟庭還寂寂(이퇴송정환적적) 아전이 물러가자 관아 뜰이 고요한데
 鳥臨書幌自關關(조림서황자관관) 새는 책방의 휘장에서 저들끼리 지저귀네
 彈琴也是縈心事(탄금야시영심사) 거문고를 타도 응당 마음이 쓰이는 것이니
 獨坐新亭自日閒(독좌신정자일한) 새로운 정자에 홀로 앉아 한가롭게 한낮을 보내네
 
 작자는 사군(使君, 임금의 명령을 받고 온 신하)을 만나려고 인천 관아에 왔다. 비류(沸流)가 미추홀(彌鄒忽)에 나라를 세웠던 것을 염두에 둘 때, 바닷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관아 주변의 풍경은 의외로 쓸쓸함을 자아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사군의 임무를 맡고 있는 자는 세속의 번잡함을 멀리하고 전원생활을 추구했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으로 여길 만했다.

 작자는 사군을 만난 후 함께 숲길을 지나다가 풀숲 사이에 피어있는 꽃을 발견하였다. 멀리서 보면 흔한 풀밭이겠지만, 가까이에서 풀 사이의 꽃들을 발견하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이다. 흔히 한시(漢詩)에서 수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들을 '검소한 덕'으로 비유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작자에게 풀밭에 사이에 피어있는 꽃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일상 업무가 끝난 관아는 고요했지만 그러한 적막함을 새들이 깨뜨렸다. 하지만 고요함과 그것의 중간 중간을 가르는 새소리가 조화롭게 들렸다. 거문고라도 뜯으며 흥(興)을 돋우려 했지만 인위적인 것이 개입되는 게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한가롭게 있는 것이 현재의 조화로움을 즐기는 방법이었다. 마침 관아 안에 새로 지은 정자[新亭]가 있었기에 그곳에서 한낮의 자연스런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관아 뜰의 한켠에 새로 지은 정자가 있었다는 것은 이원굉(李元紘)의 신정(新亭)이라는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客來展席風生樹(객래전석풍생수) 나그네가 와서 자리를 펴니 바람은 나무에서 일고
 吏散歸農晝掩關(이산귀농주불관) 아전들 흩어져 농사지으러 가니 대낮에도 문을 닫았네
 
 신정(新亭)에 자리를 펴고 주변을 조망하니 농사를 짓고 있는 아전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낮인데도 관아의 문을 닫고 농사를 지으러 간 아전들의 모습을 통해, 관아에 소소한 송사가 없을 정도로 인천 풍속의 넉넉함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인천 관아는 한적한 전원생활의 일부분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도연명을 견인하고 대낮에 관아의 문을 닫은 채 농사를 짓고 있는 아전들의 모습에서 이런 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관아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1899년)에 기대 인천도호부의 건물 구성을 재구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인천도호부에는 객사(20칸), 동헌(10칸), 내동헌 (33칸), 삼문(三門:3칸), 사령청(9칸), 향청(13칸), 군관청(7칸), 훈무당(4칸), 옥사(4칸), 어용고, 군기청(7칸) 등 15∼16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군관청은 광복 전까지 파출소로 사용되다가 화재로 사라졌고, 내동헌은 1955년까지 인천시 문학출장소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남아있던 동헌 등의 건물을 이전 및 개축하였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