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38>이규보의 애민(愛民)
이규보는 13개월 동안 계양태수로 있었다. 부임지의 여러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선정을 베풀기에는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태수나 관료들이 백성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태수가 부로에게 보이다(太守示父老)」
 
 我是本書生(아시본서생) 나는 본래 서생이라
 不自稱太守(불자칭태수) 스스로 태수라 칭하지 않네
 寄語州中人(기어주중인) 이 말을 고을 사람에게 부치니
 視我如野耈(시아여야구) 나를 늙은 농부로 여기네
 有蘊卽來訴(유온즉래소) 억울하면 곧 와서 호소하여
 如兒索母乳(여아색모유) 어린아이 어미 젖 찾듯 하네
 久早天不雨(구조천불우) 비 내리지 않은 오랜 가뭄
 是亦予之咎(시역여지구) 이 또한 나의 죄이네
 慇懃謝父老(은근사부로) 은근히 부로에게 사과하지만
 不如速解綬(불여속해수) 속히 벼슬 그만두는 것만 같지 않네
 我去爾卽安(아거이즉안) 내가 가면 너희들 편할 텐데
 何須此老醜(하수차로추) 어찌하여 이 늙은이인가

 
태수로 부임하고 난 후 계양의 부로(父老)에게 보여준 시이다. 작자가 태수라는 직함을 내려놓자 백성들이 그를 늙은 농부로 여길 정도로 거리감 없어졌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아야 했던 과거와 달리 '어린아이 어미 젖 찾듯'이 늙은 농부에게 호소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가뭄은 자신의 탓이라고 한다. 물론 이규보는 계양생활 13개월 중에 기우제문을 3편 남겼는데, "당장 아침에나 저녁에 비가 오지 않으면 바로 금년은 추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내가 부끄럽고도 한탄스러워 땀이 물 흐르듯 하는가 하면,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서 달갑게 천벌을 기다릴 각오였습니다(「又祈雨城隍文」)"처럼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면서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빌기도 했다.
 
 「우연히 읊어 관료에게 보이다(偶吟示官寮)」
 
 龔黃非異人(공황비이인)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도 특이한 사람은 아니지
 力學行可到(역학행가도) 힘써 배우면 이를 수 있다네
 但緣天性疏(단연천성소) 다만 천성이 워낙 성글어
 稜角久未露(능각구미로) 두각이 오래도록 나타나지 못했네
 甘食與安眠(감식여안면) 달게 먹고 편히 잠자며
 民訟任鴉噪(민송임아조) 백성의 송사는 까마귀 울음소리에 맡겼네
 不曾罰其頑(불증벌기완) 일찍 그 완악함을 벌하지 않고
 亦不詰其盜(역불힐기도) 그 도둑도 꾸짖지 않았네
 臥閣自逍遙(와각자소요) 누각에 누워 한가히 노닐면서
 有酒卽醉倒(유주즉취도) 술 있으면 맘껏 취하였네
 人情各不同(인정각불동) 인정이 각각 같지 않으니
 莫道老而耄(막도로이모) 늙어 망녕이라 말하지 마오
 殘民難急理(잔민난급리) 잔민을 급하게 다스리기 어려우니
 可撫不可暴(가무불가폭) 어루만져야지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네

 
위의 시에서 백성들을 대하는 관료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관리로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거론하면서, 누구건 그러한 관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는 유능한 지방관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공수는 한(漢)나라 때 영천 태수(太守)로 부임해서 백성들이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팔아 밭가는 소를 사게 하여 그 고장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자이다.

마음만 먹으면 공수와 황패처럼 할 수 있지만, 천성이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공수와 황패와 달리 계양태수로서 손을 놓고 있는 듯한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다. 송사를 까마귀 울음소리에 맡기고 도둑을 꾸짖지 않는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하지만 계양에 부임하고 그곳의 여러 특성을 파악하고 있는 시기라 하면, 작자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관료들이 백성들을 급히 다스릴 수 없을 때 폭력을 사용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데에서 이런 면이 두드러진다. 이런 판단의 바탕에는 백성들 개개인의 인정[처지]이 다르다는 점과 그들의 처지에서 이해하려는 점(可撫)이 자리잡고 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