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39 근대식 정미소
'유군성 정미소' 1924년 한국인 최초 경영
▲ 1930년대 인천의 한 정미소 정경과 미국인 사업가 타운센드(위 사진). '담손이 방앗간' 사진은 아직 발견 것이 없다.
개항기 인천에 진출한 서구무역상사로는 영국계 이화양행(怡和洋行), 독일계 세창양행(世昌洋行), 미국계 타운선상회(陀雲仙商會)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세창양행이 가장 규모가 컸다.

일반에게는 잘 부러지지 않는 '세창바늘'과 젖 떼는 약 '금계랍' 등으로 널리 알려졌다.

타운선 상회(Morse&Townsend Co.)는 1884년 내동에서 설립해 선박·화약 등을 수입 판매했다.

특히 이 상회는 상해 소재 영국 상사의 대리점도 겸해 기반이 탄탄했다.

그 여세를 몰아 국내 최초의 증기력 정미소를 열었는데 민간에서는 '담손이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영어 '타운센드(Townsend)'의 음차어가 '타운선(陀雲仙)'이었고, 그 발음의 민간 어원적 축약어 '담손'에, 특정 사물을 가리키는 접미사 '-이'를 붙여 '담손이'가 된 것으로 변천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정겨운 이름 그대로 '담손이 방앗간'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담손이' 전에 방앗간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연자방어나 디딜방아 방식보다 한 걸음 나아간 정미소를 1889년 한 일본인이 지금의 중구 중앙동 4가에 설립했으나 1892년 타운센드가 국내 최초로 증기를 이용한 기계식 정미소를 세워 근대 방앗간을 탄생시킨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제작한 '담손이 방앗간'의 정미기는 당시 신안 특허품으로서 쌀을 곱게 도정할 수 있는 최신형이었다.

표면을 깨끗하고 광택이 나게 하는 것은 물론 돌이나 뉘가 섞이지 않는 최상품의 쌀을 생산해 일본과 연해주 등에 수출하기도 했다.

'담손이 방앗간'에 자극을 받은 인천항의 정미업계는 급속히 그 수가 늘어 대형 정미소 19개소, 소규모 정미소가 21개소에 이르렀다.

그 결과 1일 7천 석, 1년 300만 석을 도정할 수 있어 정미업이 인천 산업의 대명사로 불려졌다.

한국인이 경영한 정미소로는 1924년 유군성이 중구 신흥동에 세운 '유군성 정미소'가 처음이다.

정미기 5대, 직원 70여 명으로 시작해 1일 현미 250석, 정미 100석을 처리한 그의 출발은 한국인이 정미업계에 진출하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