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재봉틀은 혼수의 필수였다. 지금의 허다한 가전제품은 아니라도 재봉틀은 갖춰야 했다. 그러나 큰 부잣집에나 있던 재봉틀을 지닌 가정이 지금은 별로 없다. 그만큼 바느질을 별로 않는다는 뜻이다. 웬만한 바느질과 다림질은 가까운 세탁소에서 대행한다.

 재봉틀이 발명된 것은 1829년 프랑스의 재봉사 바르텔미 티모니예에 의해서였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대량의 군복을 만들기 위해 요긴하게 쓰여졌다. 그로 인해 재봉틀에 일감을 빼앗긴 성난 삯바느질꾼들이 공장을 습격 공장문을 닫아야 하기도 했다. 인력이 기계화로 밀려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후 재봉틀이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것은 20년이 지난 후였다. 미국의 아이잭 싱거가 재봉틀 개량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날 밤 구멍이 뚫린 창을 휘두르는 기사의 꿈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초기 재봉틀을 몇군데 보완 1851년 특허를 얻어 싱거사를 설립했다. 그 무렵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는 싱거 재봉틀로 최초의 비행기 날개를 꿰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설로는 재봉틀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1755년 독일의 바이젠탈에 의해서이다. 영국의 토머스 스톤은 1804년 재봉틀 특허를 획득했다. 하지만 실용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는데 미국의 헌트(1834년)와 호위(1846년)가 뜨개바늘 대신 재봉틀에 바늘을 달아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했다고 한다.

 아셈 회의에 참가했던 각국 정상들의 서민 모습이 신문마다 보도되었다. 검소한 생활에 몸이 익은 듯 준비된 서비스도 마다했다고 한다. 옷소매가 닳아빠진 양복을 입고 영부인들도 손수 세탁에 다림질을 하더라고 했다. 특히 어느 총리 부인은 직접 옷을 만들기 위해서인 듯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을 사더라고도 했다. 그분의 가정에는 재봉틀이 있을 듯 했다.

 그들의 모습이 창피하거나 명예를 훼손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켜보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신뢰하여 따를 만한 지도자라 여겨질 뿐이다. 우리 상류사회의 호화사치가 연상되어 씁쓸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