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사거리는 애당초 사거리가 아니었다. 경인국도의 왕복 2차선 한적한 도로였을 뿐이다. 그때는 인근에 겨우 옛 남구청에서 나오는 곁길이 있었고 인천기계공고로 향하는 길도 없이 경인고속도로 육교에서 지름길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공업학교생들은 숭의동에서 수봉공원을 넘어 도보로 등교했었다.

 이곳에 사거리가 조성된 것은 60년대-현재의 지점에서 도화동 방면과 주안역전으로 직선도로가 개통되면서 이다. 도화동쪽의 교통인구를 소화하고 경인국도만으로는 증가하는 교통량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선의 도로상을 가로지르는 십자로가 아니고 좌측으로만 두갈래 도로를 개설하다 보니 보기에도 정상의 사거리가 될 수 없었다. 지금 보기로는 영어의 K자형 사거리라고 해야 알맞다.

 도화동을 향해 철도위로 교량을 가설할때 큰 사고가 발생할뻔 했었다.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빔을 걸쳐 놓을때 마침 강풍에 철재가 철로로 내려 앉았었다. 다행히 열차가 지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 시각에 열차라도 달렸더라면 어찌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도 그 자리에는 새로운 전철 역사가 세워진다는데 위치선정을 놓고 이해의 시비가 그치지 않았었다.

 지금의 이곳 도화동 일대는 도마(道馬)다리라고 불리우던 곳이다. 원래 도마다리는 수봉공원 진입로 일대를 지칭하던 곳으로 잡목의 작은 숲을 이루느라 산새가 깃들였는데 공기총을 든 사냥꾼들이 많았다고 신태범 박사가 회고한 바 있다. 이곳 도마다리와 숙골(禾洞)이라 불리던 선인체육관 주변이 통합되어 오늘의 도화동이 되었다.

 그처럼 한적해서 시골길이던 도화동은 지금 번잡한 교통요지이다. 이곳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한번 걸리면 오래도록 지체할 수밖에 없어 심야에는 등불이 명멸하기 전 통과하느라 차량들이 질주한다. 그러느라 사고가 잦다. 이곳 도화동 사거리가 교통사고 사상자가 가장 많은 곳이 되었으며 지난 한해 6일에 한번꼴로 사고가 발생한 셈이라고 한다. 사거리가 아니었더라면 사(死)거리도 아니되었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