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4> 인천 '우체국'의 애환
▲ 인천우체국
▲ 집배원 '우전인'
4월22일은 '정보통신의 날'. 전보나 전화도 없던 시절, 지역 간의 소통은 오로지 인편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가 기관에서 운영하던 공적인 통신망을 제외하고 또 지배층 소수를 제외하면 아마도 국민 대다수는 불소통의 시대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표만을 붙여 지역 간 소통할 수 있게 한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정총국 인천분국의 설치
1884년(고종 21) 4월22일 고종은 신식 우편제도인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설립을 명했다. 그리고 6개월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인천에 우정분국을 설치하고 우편물을 배달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우정총국은 전국적으로 우편사업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관이었지만 초기 우편업무를 실시할 대상으로 선정된 지역은 서울과 인천 두 곳이었다. 신식 행정제도인 우편업무를 서울과 인천 두 곳에서 먼저 실시한 것은 외국과 주고받는 국제우편물을 염두에 둔 조치라 할 수 있었다.

초대 우정총국 인천분국장은 월남 이상재(李商在)로,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당시 일본의 우편제도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던 인물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관직에 등용됐다. 그러나 이 해 12월4일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을 이용해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개화파가 주도한 이 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남에 따라 우정총국은 폐지되고 말았다.

근대우편의 특징은 우표를 우편 이용의 기본 수단으로 삼고 출발했다. 당시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 등 다섯 종의 우표였는데 우표의 액면 금액이 당시에 통용된 화폐 단위인 '문(文)'으로 표시돼 있어, 뒷날 우표수집가들이 그들 우표에 '문위우표(文位郵票)'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최초의 우표와 인천의 세창양행
당시 조선은 우표를 제조할만한 시설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5종의 우표 인쇄를 일본 대장성인쇄국에 의뢰했다. 다섯 종의 우표 가운데 5문과 10문 우표는 우정총국 개시일 이전에 도착했으나, 우정총국이 업무를 개시한 지 20일 만에 문을 닫았으므로 실제로 사용한 우표는 5문과 10문 두 종에 불과했다. 우정총국이 문을 닫고 난 수개월 후 일본공사관은 크고 작은 두 궤짝의 우표를 보내며 우편인쇄 대금을 지불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미 우정총국이 폐지됐고 국가 재정이 빈약할 때여서 우표 대금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때 총세무사 미국인 메릴(Merrill)의 중재로 쓸모없게 된 우표를 인천의 독일인 무역회사 세창양행에 팔기로 함으로써 해결했다. 덕분에 세창양행은 25문·50문·100문의 고액권 우표 130만매를 손에 넣게 됐다. 이 우표들은 후일 '코리아 최초의 우표'라는 이름으로 포장됐고, 세트로 흘러나온 문위우표 중 5문과 10문 우표의 값이 제일 비쌌다. 이들 두 종은 이미 사용돼 잔량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세창양행의 주인 마이어(Meyer)는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우리나라 상품을 수입해 1889년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산업박람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가 진짜 우표수집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두 번째 우표인 태극우표가 발행되자 그는 태극우표 4종이 붙은 봉피(封皮)를 만들어 친지와 우표수집가에게 뿌리기도 했다. 그들 봉피가 한국우표사에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인천우체사의 설치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새로운 우편사업을 다시 시작한 것은 1895년 7월이었다. 한성에는 통신국 내에 한성우체사를 설치하고 인천에는 이운사(利運社) 내에 인천우체사를 설치해 두 지역에서 우편 업무를 동시에 시작했다. 이후 우편사업은 전국의 주요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는데, 1898년 전국 341개 부(府), 군(郡)에 임시우체사가 설치돼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우편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1900년 1월1일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하면서 기구도 점차 확대돼 갔다. 그리고 10문의 태극우표도 함께 발매됐는데, 외국인들이 우표 수집을 위해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판매고가 우편물에 비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집배원은 '우전인(郵傳人)' '체전부', '체부', '우체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를 읽어야 하기에 언문은 물론 한문을 읽을 줄 알아야 했다. 인천과 한성의 우체사 체전부는 매일 오전 9시 같은 시각에 출발해 중간 지역인 오류동 신장기에서 만나 우편물을 맞교환했다. 체전부의 발걸음은 매 시간 10리 걷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인천에서 오류동까지의 거리가 40리여서 당시의 체전부들은 하루 8시간 80리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들은 경인철도가 부설되기까지 걸어 다니며 우편물을 교환해야만 했던 것이다.

통신의 합병과 인천우편국의 탄생
일본의 통신권 침해는 개항과 함께 시작됐다. 일본은 자국민에게 통신 편의를 제공한다는 구실로 영사관 내에 설치한 간이우체국에서 우편 업무를 취급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그것이 비록 불법이긴 했지만 근대식 우편 업무를 실시하기 전이어서 시비를 가리기도 어려웠다. 그 뒤 1891년 출장소라는 이름으로 서울에 '인천우편국 경성출장소'를 설치하면서 일본 통신기관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1894년 국내에 있는 일본우편국의 수는 29개로 늘어나 있었다.
조선정부는 1895년 우체사를 설립하고 우편사업을 재개하면서 일본우편국의 철폐를 요구했으나 오히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4월 한일통신기관협정 체결을 강요함으로써 조선의 통신기관을 탈취했다. '우체사'의 명칭도 일본식인 '우편국'으로 바꾸고 금융 업무까지 취급했다. 일본의 인천우편국은 1923년 12월10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새 청사를 준공했다.
광복 후 1949년 8월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인천우편국'은 우리의 '인천우체국'으로 돌아왔고, 현재 우체국 업무까지 겸하고 있는 '한국 최고(最古), 최초'의 우체국이 됐다. 198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됐는데, 그런데 어느 날 '인천중동우체국'으로 명칭이 바뀌어버렸다. 역사와 문화, 문화재로서의 가치 등등…. 하루빨리 본래의 이름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