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36.해군함장
국토부, 흉상 제작 …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
▲ 양무호
"우리나라는 전쟁에 대한 경계가 소홀해 군 장비를 다스리는 정책이 허술합니다.

왜구의 침범이 없었던 해가 없었는데 뜻밖에 인천, 안산 등지로 들이닥친다면 어찌 손을 쓰겠습니까?" 조선조 정조 때인 1785년 7월에 중신 조익(趙翌)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의 일부이다.

그는 구체적인 대안으로써 "인천부를 옛 제물진 터(지금의 중구)로 옮기고 방영(防營)을 설치하여 부평, 안산 등지의 육로를 관할하게 하여 육로를 방어하고, 영종도 등지의 수군을 관할하되 수로 방어를 겸하게 한다면 수륙을 모두 방어하는 태세가 됩니다."고 아뢰었다.

오늘날 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전략적 판단이었는데 그 같은 군사적 중요성은 근대 들어와 더욱 부각되었다.

1878년 신정희에게 화도진(花島鎭)을 설치하고, 1893년 강화 갑곶진에 최초의 해사(海士)인 '조선수사해방학당'을 세운 것은 현실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였다.

그 몇 년 후 고종은 군함 도입을 결정하였다.

중신들은 '즉위 40주년 기념행사'에 예포를 쏘기 위한 군함 도입을 건의했지만 이를 윤허한 고종은 대포가 달린 군함만 가지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03년 4월 1일 고종은 최초의 군함을 '양무호(揚武號)'라 명명하고 제1차 관비 유학생으로 동경상선학교를 졸업한 신순성(愼順晟)을 함장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 함장이 이끌고 온 양무호는 고종의 뜻처럼 강대하지도 순탄치도 못했다.

일본 회사의 농간에 속았던 것이다.

결국 신 함장을 위시한 72명의 대원들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 양무호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신 함장 자신은 망국의 울분을 삭이면서 광제호 선장, 인천해원양성소 교관 등으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44년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인천 자택에서 하직하고 말았다.

신 함장의 개척자적 행장을 기려 국토해양부가 2012년 5월 24일 신순성 함장의 흉상을 제작해 부산 소재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한 바가 있다.

최근 시가 '인천 인물 기리기 사업'에 나서 호평을 받고 있다.

신순성 함장에 대한 재조명 사업도 곁들인다면 뜻이 배가 되리라 믿는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