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31 한국 경제의 씨앗이 된 파독 근로자
만석동 한국기계공업㈜ 산업연수생, 서독 뉘른베르크 파견
M·A·N社와 기술제휴 … 훈련자 입국 '고출력 디젤엔진' 생산
3년동안 월 14만원 받고 근무 … '선진기능 습득' 혹독한 연습도
▲ 인천 만석동에 있는 한국기계는 기술 제휴를 통해 기능공 30명을 서독(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만(M·A·N)사로 파견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중공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1971년 2월 공장 마당에서 열린 파견 환송식 후 기념사진.
1963년부터 70년대 후반까지 광부 8000여 명, 간호사 1만1000여명이 서독(독일)으로 일하러 갔다.

그들이 고국에 송금한 돈은 1억 달러가 넘었고 한국 경제 도약의 훌륭한 씨앗이 됐다.

경제 개발을 위해 단돈 1달러도 아쉬웠던 당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2%에 미칠 만큼 큰 액수였다.

근로자 파견은 광부와 간호사뿐 만 아니라 기능공(기술자)도 포함되었다.

1971년 2월 7일 하오 2시 엔진조립공 5명, 선반공 5명, 기계주형공 5명 등 똑같은 작업복을 입은 기능공 30명이 KAL기에 몸을 싣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그들은 인천 만석동에 있는 한국기계공업(주) 근로자들로 서독 뉘른베르크에 있는 만(M·A·N)사로 파견되는 기술훈련생들이었다.

산업연수생이란 명목으로 파견된 그들은 만(M·A·N)사에서 먼저 4주간의 기술 훈련을 받은 후 총 3년 동안 월 950마르크(약 14만원)을 받고 일했다.

한국기계는 그해 말까지 3차례에 걸쳐 모두 500여명의 기능공들을 서독으로 보냈다.

만(M·A·N)사는 당시 창업 120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디젤엔진 전문업체로 대형 선박엔진, 디젤기관차, 자동차용 디젤엔진 그리고 산업용·군사용 엔진 등을 생산했다.

1970년 한국기계와 디젤엔진 공장 설립을 추진하면서 기술 제휴를 맺었다.

이 때 기능공들을 서독에 파견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들은 단순히 외화벌이를 위해 서독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었다.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매일 기름이 뒤범벅이 된 채 고된 훈련을 받았다.

1975년 5월 한국기계는 서독의 차관 제공과 만(M·A·N)사의 기술 제휴로 단일공장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의 디젤엔진 공장을 준공했다.

서독에서 훈련을 받은 기술자들이 돌아와 연 6만대의 고출력 디젤엔진을 생산했다.

그들은 낯선 이국땅에서 고된 훈련과 작업을 하면서도 조국에 대한 사랑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서독 현지 신문에 보도된 고국의 수해 소식을 접하고 수재 의연금 330마르크 (4만1100원)을 한국으로 보냈다. 1974년 4월 식목일을 맞아 묘목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근로자 211명이 6개월 간 푼푼히 모은 738마르크(약 11만원)을 '재독 대한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기탁했다.

그들은 처음 서독에 와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서독의 공업 발전보다는 울창한 숲이었다고 강조했다.

독일 국민들은 나무 가꾸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1페니를 비롯해 모든 동전과 지폐 뒷면에 하나 같이 나무와 관련된 그림이 있다'라는 설명도 함께 보냈다.

동구 만석동에 있던 한국기계공업(주)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6월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의 후신이다.

군 장비 전초 공장이었던 조선기계는 일본육군 조병창으로부터 잠수함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잠수함을 진수시키기 위해 도크를 신축하고 1300여 명의 인력을 확충하고 그들을 위한 숙사(宿舍) 112동을 새로 건축한다.

이때에 세워진 집들이 현재의 만석동 '아카사키촌'의 근간이 된다.

광복과 함께 조선기계는 정부 재산으로 넘어가 1962년 까지 상공부와 국방부 관리를 받으며 광산 자재 및 일반산업 기계를 생산한다.

국영기업체로 개편되었다가 1968년 신진자동차사로 운영권이 넘어갔고 1976년 대우그룹으로 인수돼 대우중공업으로 간판을 고쳐 달았다.

회사 이름은 여러번 바뀌었지만 만(M·A·N)사와 기술 제휴를 유지하고 기술자들을 계속 파견하면서 중공업 기술요원을 양성했다.

2005년부터 이 회사는 '두산인프라코어'가 되었다.

현재 굴삭기 등 건설기계를 비롯해 공작기계, 디젤엔진 등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45년 전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낯선 땅 독일로 건너갔던 30명 기능공들의 기름땀이 밑바탕이 되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