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3> 왕실 도서관 유일의 분관, 외규장각
▲ 강화부 궁전 속의 외규장각
삼국시대 이래 도서를 관리하는 국가적인 체제가 갖추어 졌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보관하는 선원전(璿源殿)이나 융무루(隆武樓), 홍문관을 두어 왕실도서관을 겸했는데 여러 차례 화재와 병화로 책들이 거의 일실됐고 결국 정조 때 규장각을 두게 됐다.

외규장각의 설치
외규장각은 규장각이 창설된 지 6년 후인 1782년(정조 6년) 강화부의 행궁 자리에 세워졌다. 규장각의 분소, 외부 서고와 같은 기능을 가진 외규장각은 임금이 쓴 글씨나 시문을 뜻하는 '규장(奎章)'이라는 의미처럼 실록을 보관했던 사고(史庫)와는 달리 어보(御寶), 어제(御製) 등 왕실 물품과 어람(御覽)용 의궤(儀軌) 등 왕실관계의 특별한 가치를 지닌 중요 기록을 보관하는 기관이었다. 외규장각은 6칸 규모로 강화부 행궁 동쪽에 자리했는데, 강화도 행궁지에 설치한 이유는 국내의 변란이나 밖으로 외적의 침입에서 안전을 기할 수 있는 곳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어필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당시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신(戚臣)·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데 있었다. 즉, 정조의 개혁정치를 위한 중추기관이었다.

예를 들면, 규장각에서 과거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했는데,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매월 두 차례씩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세력 확대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에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庶孼)로서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고 있던 자들을 등용해 그들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던 것도 정조의 개혁정치와 규장각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규장각의 변화
규장각은 장용영(壯勇營)과 함께 정조의 친위세력의 형성을 위하여 설치됐기 때문에 정조가 죽은 뒤에는 장용영의 해체와 함께 그 기능이 현저히 약화돼 단순히 역대 왕들의 어제와 도서를 보관·관리하는 기능만 가진 기구로 남았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어제·어필·선원보첩 등이 종친부로 이관돼 규장각은 도서관리 기능만 남게 됐다. 1895년 갑오개혁 때 규장각은 궁내부(宮內府) 부속기관으로 편성돼 규장원(奎章院)으로 개칭됐고 종친부로 넘어갔던 어제 등이 되돌려졌다. 1897년 아관파천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다시 본래 이름인 규장각으로 환원됐다.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도서를 점유했다가 1923년 경성제국대학이 설치되자 모두 이관됐다. 광복 후 국립서울대학교가 개교하면서 부속 도서관으로 이관됐고, 1992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분리돼 독립기관으로 됐다. 현재 도서 15만점, 고문서 7만점, 목판 1만7000여점 등 도합 약 25만점이 전해지고 있다.

외규장각의 자료, 소실에서 반환까지
외규장각에 봉안됐던 자료의 종류와 수량은 "강화부외규장각형지안(江華府外奎章閣形止案)"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형지안'이란 '현재의 상황을 밝힌 장부'라는 뜻이다. 현존하는 '형지안' 중 가장 마지막에 작성된 1857년 자료를 통해 병인양요 전 외규장각에 소장된 자료의 목록을 알 수 있다. 당시 외규장각에는 옥책(玉冊), 금보(琴譜), 교명(敎命) 등 왕실 물품 25점, 어제(御製), 어필(御筆) 68점, 기타 족자류 6점, 의궤(儀軌) 401종 667책, 의궤 외 서적 606종, 4400책으로 총 5166점에 달하고, 그 중 서적류가 1007종 5067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강화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는 어람용(御覽用)이라 조선시대 최고의 도서와 예술적 품격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우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은궤상자 19점과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의궤를 비롯한 340책의 서적과 주요 왕실자료를 약탈해 갔다. 그리고 행궁, 관아, 외규장각 건물에 불을 지르고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이로 인해 외규장각에 남아있던 5000여책의 중요자료들이 소실됐다. 당시 약탈해간 도서 대부분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됐고 일부는 선물로 줬다고 한다.

외규장각 의궤는 1975년 재불학자인 박병선 박사가 소재와 목록을 소개하면서 알려졌고, 1991년 서울대학교가 정부에 외규장각 의궤 297점 반환 추진을 요청, 정부가 프랑스에 목록을 전하면서 교섭이 시작됐다. 1993년 한국과 프랑스 대통령 정상회담에서 미테랑 대통령이 의궤 1책을 전달하면서 반환 의지가 있음을 밝혔지만, 의궤 297점이 모두 돌아오기까지는 2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2011년 4월14일부터 5월27일까지 4차에 걸쳐 외규장각 의궤 296책이 프랑스로부터 145년만에 돌아왔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 등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최근 의궤를 소개하는 종합DB가 구축돼 인터넷으로 열람할 수 있다.

현재 인천 강화군의 고려궁 터에는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외규장각의 자료들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정족산 사고와 더불어 우리에게 이 시대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인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유적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것이 가치 창조의 관건이 될 것 같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