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우침 이야 진정 / 거룩한 恩惠 로구야. /…(중략)… / 窒息한 靈魂에 다시 / 사랑이 이슬나리도다. / 뉘우침 이야 진정 / 幸福스런 아픔 이여니!」(1932년 발표된 「뉘우침」에서) 시인 정지용(1903~?)의 삶과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종교시 5편이 발굴, 공개됐다.

 월간 「문학사상」 11월호는 「정지용과 천주교」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어 카톨리시즘이 그의 문학인생에 미친 영향을 분석함과 동시에 「셩부활주일」, 「주여」, 「성모」, 「가장나즌자리」, 「뉘우침」 등 5편의 종교시를 부록으로 선보였다.

 이들 시를 발굴한 문학평론가 이희환씨(인하대 강사)는 기고문에서 『1930년대 초반 천주교잡지 「별」에 소개된 이들 시는 그동안 학계에 보고되지 않는 것들』이라고 전제한 뒤 『카톨리시즘이 완강하게 지용의 삶과 문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이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지용이 언제 천주교에 입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본 도시샤 대학 졸업 한해 전인 1928년 11월에 재일본 조선공교신우회 서기로 활동하고 있음을 볼 때 그 몇 해 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공개된 그의 종교시들은 1927년 7월에 창간된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연합회의 기관지 「별」에 게재됐던 것. 정지용은 방지거라는 세례명으로 창작시 「셩부활주일」, 「뉘우침」과 번역시 「주여」, 「성모」, 「가장나즌자리」를 소개했다.

 이 가운데 후일 「은혜」로 제목이 고쳐진 「뉘우침」은 그의 서정적 시세계를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것으로, 이씨는 『지용의 종교와 문학이 길항하는 첫 실험작』이라고 평가했다.

 「주여 연약한 내올시다! / 뷔인 두손이 무겁도락! / 구버살피시압 이와갓치 「당신」을 피하면서 「당신」을 찾는 이 눈모습 //…(후략)…」(1931년 번역된 폴 피어링스의 「주여」에서) 정지용은 1933년 창간된 「가톨닉청년」을 중심으로 사상과 문학에 걸쳐 의식적 방향전환을 도모했다. 이 잡지의 문학창작 분야 편집을 맡은 그는 김기림, 이병기, 이태준, 박태원 등 중량급 시인과 작가를 이 잡지에 끌어들이는 한편 그해 벌어진 프로문학과의 논쟁에도 가담했다.

 카프(KAPF)의 서기장 임화가 한 신문에 『카톨리시즘은 문화의 퇴화』라고 강하게 비판하자 그는 같은 신문에 즉각 반박문을 기고했는데, 이는 당대 문단에 대한 정지용의 보기 드문 직접 발언이었다.

 「가톨닉청년」에 15편의 시를 발표한 그는 1939년을 전후해 이 잡지가 친일화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었으나 마음 속에 간직한 신앙심까지 버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지용은 후일 「문장」에 발표한 시론에서 『신앙이야말로 시인의 일용할 신적 정도가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1946년 가톨릭 신문인 「경향신문」의 주간이 돼 컬럼과 사설을 담당했으며 같은해 연말에는 노기남 대주교를 찾아 시국을 협의하기도 했다.

 이씨는 『지용의 종교시는 이후 시들을 예비하는 정신수양과 시적 수련의 도량역할을 했다』며 『영혼과 육신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얻어지는 자연 속의 달관과 체념은 지용 종교시의 정신적 방황과 피로가 없었다면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