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도시 인천」 지금은 그 자취조차 흐릿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의 애칭으로 불렸던 이 명칭은 개항 이후 계속돼 온 민초(民草)들의 저항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식민지 시대에 빈발했던 근로자들의 노동쟁의는 저항의식 발달의 중요한 텃밭이 됐다.

 당시 발행된 신문과 전문가들은 일제하 인천지역의 노동쟁의를 『항구도시와 공업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연일 전개되어 항상(恒常)적인 현상이었고, 자본가와의 대결 뿐 아니라 일제와의 대결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 인천의 근로자들이 끊임없이 노동쟁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탄압이라는 요인 이외에도 입지적인 면과 당시 한국인의 경제적인 실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천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보다도 일찍이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다. 여기에 수도 서울에 인접해 있다는 입지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본상인들의 진출이 많았고 이에 따른 경제적 잠식과 수탈이 커 시민들의 어려움과 불만은 막대했다.

 1900년대 인천지역 상공업자와 재산소유 실태통계는 간접적이나마 일제하 시민들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지역내 상공업자중 한국인은 한국인 총수에 대해 27.8%, 일본인은 일본인 총수 대비 45.9%로 한국인의 상공업자 비중은 경성, 평양, 부산, 대구 등 5대 도시중 가장 적었다.

 재산소유 실태도 1930년대 초반 인천의 총인구 7만2천8백명 중 한국인은 5만9천명으로 81%에 달했으나 토지소유 규모는 총 1백1만7천평 중 2만6천평으로 겨우 22%에 불과했다. 납세액도 총 41만4천여원 중 8만원으로 19%에 그쳤다.

 일본인들이 인천 경제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일제하 인천지역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경제적 빈곤문제 해결이 시급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 발생한 노동쟁의가 항일투쟁의 성격을 띤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생존권 보호와 민족적 저항이라는 양면적인 성격을 띠었던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24년 이후 부터이다. 개항 이후 산발적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던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은 1920년 노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설립되면서 처음으로 조직화의 중요성을 경험케 된다. 그러나 조선노동공제회인천지회가 상호부조와 계몽적 활동을 중시한 관계로 당시의 조직활동은 친목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4년 인천노동총동맹이 결성되자 지역내 노동운동은 드디어 일제 및 기업가와의 투쟁이라는 노동운동 본연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인천소성(邵城)노동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천노동총동맹은 결성과 함께 산하 조직 확대와 더불어 근로자들의 권익옹호에 주력했다.

 이 결과, 업종별 노조의 결성이 잇따랐고 그 수도 192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10여개에 달했다. 당시 인천노동총동맹에 가입한 대표적인 업종별 조합으로는 정미직공조합(설립연도 미정), 인천인쇄직공동맹(1924년 6월 설립), 인천두부판매업조합(1924년 12월29일 설립), 인천철공조합(1925년 1월11일 설립), 인천청년노동조합(1926년 8월25일 설립), 인천노우회(1926년 9월28일 설립), 인천목공조합(1925년11월15일 설립), 양재직공조합(1928년 6월24일 설립) 등이 있다.

 이들 업종별 노조 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곳은 정미업종이었다. 인천항이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많았던 항구였기에 정미소는 당시 인천경제에 대한 비중이 80%에 이를 정도로 주력산업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일했던 정미직공과 선미직공들의 생활상은 매우 비참했다.

 쌀을 고르는 선미직공들은 휴일 없이 1일 평균 10시간 노동에 평균임금이 35전에 불과했다. 이 마저 기계화의 진전으로 실직에 대한 공포감까지 겹치면서 생활은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런 선미직공들의 생활을 「눈물과 피를 긁어 먹는 정미소」라는 표현으로 고발하고 있다.

 비참한 생활과 경영진들의 횡포에 대한 정미/선미 직공들의 불만은 자연스레 집단행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미소 노동쟁의는 가등정미소, 역무정미소를 비롯해 지역 내에 있는 일본인 소유 정미소가 주 진원지였지만 주명기가 경영하던 조선정미(주)를 위시한 한국인 소유의 정미소에서도 노사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정미업계의 노동쟁의는 1920년대 지역내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이처럼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시민들의 불만을 대변한 탓에 시민들의 성원 속에서 성장하던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은 1928년을 전후해 일제의 탄압과 회유로 내분의 진통을 겪는다.

 동아일보 1928년 1월8일자 신문은 이 당시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왕년(往年)에 어떤 사태로 인천노동운동이 일시 좌절된 상태였으나 일부는 차차 시세에 따라 (인천노동총연맹과는 별개로) 노동계급 단결체를 조성할 필요를 느껴 강원실 등이 인천노동 상조회를 조직하기로 하여 1월1일 외리에 있는 일월관(지금의 경동에 위치)에서 창립되었는데 이들은 순전한 노동자들 중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창립된 것이라<&28137>.』

 인천노동계가 양분의 아픔을 겪게 된 것이다. 실제 일제의 탄압에 활동이 위축됐던 인천노동계는 일제의 조정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비투쟁적 개량주의계 노동운동가들이 1928년 설립한 인천노동상조회와 1920년대 초반 이후 인천노동운동을 지도해 온 인천노동총연맹이 변신한 노동조합으로 이분된다.

 여기에 1930년대에 접어들자 일제의 탄압 강화로 노동단체의 설립과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면서 노동운동도 크게 위축된다. 더욱이 노동운동가들이 지하로 잠복하면서 인천의 노동운동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지도를 받는 이른바, 적색노동조합이 주도를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의 노동운동의 형태와 그 주도세력도 변화한다. 1920년대 전반기까지 지역 노동운동을 주도해 온 정미업종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반면 부두근로자들이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투쟁은 오히려 강경해졌고 인천부두는 당시 한국노동운동의 메카로 떠올랐다. 이는 일제의 수탈이 강화되고 전쟁 수행을 위해 부두의 중요성이 커진 데다 부두의 특성상 참여근로자가 많고 종사자의 대부분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탄압기 인천 부두근로자들의 대표적인 파업투쟁으로는 1935년 6월에 발생한 총파업을 들 수 있다. 선박 운임문제로 노동자들의 취업을 위협한 일제 예속자본가들을 반대하여 발생한 이 파업에서 근로자들은 경찰들이 파업 조정에 순응케 하려고 시도한 조합 상층부들의 배신행위를 규탄하고 파업 파괴분자들을 습격하는 한편 진압에 나선 경찰에 거세게 항거했다.

 부두근로자들의 이같은 항거에 못지 않게 「인천의 명물」 성냥공장의 노동쟁의도 1930년대 인천노동운동을 주도한 한 축이었다. 1920년 말부터 단체행동에 본격 나섰던 인천성냥공장 근로자들은 1931년 파업에서 승리를 쟁취하자 이어 1932년 금곡리(지금의 금곡동)공장과 송림정(지금의 송림동)공장이 경영주의 횡포에 항거해 동시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에 참여했던 성냥공장 근로자들은 정미업계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2주일만에 무조건 업무에 복귀하기로 하고 해산됐다. 그러나 이는 지역내에서 최초로 발생된 동종 업계의 동맹파업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은 암울한 식민지 말기에도 지하에 둥지를 틀고 마지막까지 일제에 항거했다. 이에 따라 해방 이후에는 한국노동운동의 중심체로서, 그리고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의 발원지로써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국내에서 벌어진 항일운동의 중심체였던 일제하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은 그러나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타부의 대상」으로 치부된 채 현재는 역사의 저편에서 후손들의 진정한 평가만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