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35.판유리
1902년 러시아 협력 … 병유리 생산 시작
1902년 러시아 협력 … 병유리 생산 시작
초자(硝子) 또는 파리(?璃)라고도 한다.
빛을 투과하는 성질과 다채로운 색채, 다양한 성형성과 재생성 등을 지녀 옛날부터 보석과 다름없이 귀중하게 여겼다.
기원전 1세기까지는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귀물이었다.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증된 것은 없다.
하지만 희랍시대의 유리가 신라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것을 보면 세계 각국에서 널리 교역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낙랑시대의 구슬과 귀걸이 등인데 제조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21년에 발굴한 금관총에서 유리잔 두 개, 1924년에 발굴한 금령총에서 유리주발 두 개, 1926년에 발굴한 서봉총에서 암청색 유리주발이 각각 출토되었고, 1973년 천마총에서는 유리잔과 유리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모두 동양에서는 출토된 예가 없는 기종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상당량의 유리구슬도 출토되었는데 1981년 5월 경주군 내남면 덕천리 성부산 기슭에서 유리용 가마터가 발견되면서 신라의 유리 생산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활발했던 유리 제조 기술이 고려ㆍ조선 때 번성했던 도자 문화에 밀려 계승되지 못한 것은 아쉽다.
근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유리를 제조한 것은 1902년 이용익이 건립한 국립유리제조소에 의해서였다.
러시아 기술자의 협력으로 병 유리 생산을 시작했으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여파로 문을 닫았다.
이듬해 3월에는 인천 송월동에 소규모 유리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 후 1928년 4월에 설립된 인천유리제조소는 약병, 어항, 과자병 등을 중국에 수출했고, 1939년 서울에 세워진 일본초자주식회사도 맥주병 생산이 전문이었다.
국내 최초로 판유리를 현대식 공법으로 생산한 것은 1958년 9월30일 인천 만석동에서 문을 연 한국유리공업㈜이다.
외화 365만8천달러, 우리 돈 6억2백만 환을 투입해 20개월 간의 공사 끝에 문을 연 판유리공장은 우리나라 유리공업의 신기원을 연 산업의 총아이자 인천의 큰 자랑거리였다.
멀리서도 은빛으로 반짝이며 건재를 알렸던 공장 안 원형 급수탑이 눈에 선하다.
/인천시립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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