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2) 비운의 양무호와 광제호
▲ 양무호
▲ 광제호
1893년 고종은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영국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강화읍 갑곶리에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생도 38명과 수병 300여명을 모집해 개교했는데 이것이 바로 '총제영학당'이다. 그러나 해군력 증강을 우려하는 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결국 다음해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한국 최초의 군함
해군 장교 육성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10년 후인 1903년 4월15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의 효시라 일컫는 양무호(揚武號)가 시커먼 연기를 하늘로 내뿜으며 인천항에 들어오고 있었다. 3,400여t급 1750마력으로 최대 속도 13.5노트를 내고 먼 바다에까지 항해할 수 있는 이 대형 선박은 전장 105m 폭 12.5m에다 8㎝ 포 4문과 5㎝ 기관포 2문을 좌우에 각각 장착한, 그야말로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이름자에 걸맞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 누구도 이 군함이 단명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개항을 전후로 우리의 바닷길은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사건,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등으로 여러차례 수난을 당했다. 집채만한 덩치의 화륜선, 대포까지 장착한 함선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만큼 그러한 화륜선을 보유하고 싶은 욕망도 컸다. 당시 국력은 해군력의 우열로 좌우됐고 그것이 바로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다. 고종은 개화사상에 불타오르는 젊은 승려 이동인에게 왕실의 비자금으로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라 밀명했지만 수구파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첫 시도는 좌절됐다. 일본이 용인할리 없었음은 물론이었고 이후에도 모든 첩보망을 총동원해서 조선의 군함 구입을 원천봉쇄했다.

군함을 향한 고종의 위대한 꿈은 그로부터 8년 후 양무호 구입으로 드디어 이뤄졌다.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라스(Pallas)호라는 화물상선으로 1894년 일본 미츠이물산이 25만원에 구입해 일본-홍콩간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구입시부터 9년이 지난 시점인 1903년 한국 정부가 이 배를 다시 넘겨받을 때 그 값만은 오히려 더 올라 개조수리와 무기장착비 일체를 포함해 55만원이었다.

양무호 구입의 이면
군함 개조공사를 거쳤다고 했지만 퇴역한 일본 군함에서 떼어낸 구식 함포를 달아놓은 정도였고, 그나마 구입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4개월여동안 인천항에 억류되는 수모를 당하다가 이 해 8월 시운전을 거쳐 우리 군함으로서 정식 등록했다. 더구나 이를 운용할 마땅한 인력조차 없었고, 하루 석탄 43t이라는 막대한 운항비용을 감당할 여력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이 배는 제대로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무단 징발됐다가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무기는 일본군이 제멋대로 떼어낸 후였다. 결국 1909년 경매를 통해 다시 일본 하라다 상회에 4만2000원에 매각됐다.

당시 양무호 구입금액은 국방예산의 30%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군함구입 자체를 원천봉쇄하던 일본이 자국의 운송회사를 내세워 조선에 함선을 판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만한 대목이었다. 거기에는 '국력강화'라는 그럴듯한 국가적인 명분과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음모와 비리가 숨어있었다. 처음부터 대한제국 군주의 무지와 일본의 속임수, 아첨하는 관료들이 어우러진 '사기' 사건이었던 것이다.

광제호의 예정된 운명
양무호 문제가 비등해져 가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새로운 군함 발주 계획에 의거해 일본 코베조선소에 전장 220척(66.7m), 너비 30척, 선심 21척, 화물적재량 540t, 총톤수 1056t급 광제호를 주문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조(新造) 발주선인 광제호는 해관(海關) 총세무사(總稅務司)였던 영국인 브라운의 발의에 따른 것으로, 인천해관의 관세수입자금으로 건조코자 했고 건조계약 당시의 선주도 대한제국 해관이었다. 당시 최신의 조선기술로 제작되고 또 무선전신시설이 설치돼 월미도 무선통신소간의 전파통신이 가능했다.

광제호는 자체 시운전을 거쳐 1904년 12월20일 대한제국 정부에 인도됐다. 정부는 광제호가 인천항에 도착하자 3인치 포 3문을 장착해 해안 경비함, 등대 순시선 및 세관 감시선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다. 광제호의 도입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이때까지 육군편제로만 구성돼 있던 15군부를 개편하고 군함 확보에 따른 근대식 해군편제를 마련하는 등 입법조치를 강화했으나, 해관 소속의 기선이었던 만큼 총세무사 브라운이 이 배를 들여와 마치 자기의 개인요트처럼 사용했다고 하기도 하고, 때로 한국정부의 고관들이 인천에 내려와 이 배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조약을 통해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뒤 해관의 관리권도 일본인으로 독점됨에 따라 광제호는 해군 군함으로서의 사명은 끝이 났고 사실상 그네들의 '관용선'으로 줄곧 차출됐다. 1909년 봄에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이 북간도(北間島)와 울릉도 일대를 시찰하기 위해 부산항을 출발해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간 것도, 그리고 이해 가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에 장춘으로 급파된 일본인 검사장을 태우고 대련(大連)으로 내달린 것도 모두가 '광제호'였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공식적으로 인천항로표지관리소 즉 예전의 등대국(燈臺局) 소속이었던 광제호는 조선총독부 통신국으로 이관돼 총독부의 관용선이 됐으며, 그 이름마저 광제호가 아니라 '광제환(光濟丸, 코사이마루)'으로 바뀌었고, 1912년 조선우식주식회사로 넘어가 상선으로 이용됐으며 인천 해원양성소 설립 이후에는 신순성씨를 교관으로 하는 실습선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발발 이후 석탄운송선으로 전락했다가 광복을 계기로 일본으로 철수해 우리 역사 속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