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34 개신교 선교 기지
'신학월보' 인천부 우각리서 발행
▲ 초기 내리교회 신도들과 '신학월보' 창간호
올 부활절이 이번 주 일요일로 다가왔다.

한 세기여 전인 1885년 4월 5일, 개항장 제물포일대에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던 날도 부활절이었다.

그날은 인천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기독교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 세 사람이 선교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그를 기려 내외 기독교인들은 1986년 3월 30일 부활절에 중구 항동 해안도로 옆에 2백여 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하고,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하늘을 향한 종 모양을 본뜬 세 개의 탑신, 각 면에 새겨진 구한말 백성들의 모습,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세 사람의 청동상, 기단에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놓은 당시 기도문 등이 이곳을 찾는 방문객의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인천은 그들로 하여 개신교의 선교 기지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가 창립되었고, 한국인으로 첫 안수를 받아 김기범 목사가 탄생됐으며, 교계 사상 첫 신학 잡지인 '신학월보'가 인천부 우각리(牛角里)에서 발행되었던 것이다.

음악사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전환이 있었다.

아펜젤러 목사가 국내 처음으로 도입한 풍금 반주로 내리(內里)에서 첫 찬송가를 봉헌하였고, 그 영향이 각 교회의 성가대와 민간 합창단으로 이어져서 오늘날 인천을 '성악의 도시'가 되게 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인천을 순례지로서 찾을 이유는 이렇듯 여럿이 있다.

여기에 천주교 답동성당과 성공회 내동교회의 빛나는 역사까지 조명한다면, 인천이 한국기독교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감당해 온 도시라는 것을 누구라도 쉬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어설픈 수준의 '관광산업'으로 엮어내려는 세속적 욕망은 금물이다.

역사적 이미지를 오히려 훼손할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증에 충실한 유적ㆍ유물의 수집, 보존과 함께 품격 있는 행사만이 인천의 기독교사를 온전히 지켜 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