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14.정족진과 정족사고(하)
프랑스군 강화부 점령 … 서리·사서 등 토굴 파서 봉안
<정족사고 구조>
단층·별관 타 사고와 대조 … 보관에 열람 기능까지 겸비
눈동자 색깔이 시퍼런 오랑캐들이 강화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랑캐들이 곧 '정족사고'까지 올라와 모든 책을 불태워버릴 것이란 정보가 올라왔다.
"놈들이 여기까지 올라온다면 책들이 모두 불 타고 말 것이오.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기도록 합시다!"
사서들이 왕실서적을 모두 옮긴 뒤,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정족진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11월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여명이 정족산성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승병들과 호랑이를 잡는 범포수와 합세한 조선군은 남문을 통해 정족산성으로 기어오르는 프랑스군에게 총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대패하고 만다.
최신 무기로 중국, 일본과 같은 동양인들을 제압했지만, 조선인들은 달랐다. 체구가 작고 얼굴이 새카맣지만 눈빛만큼은 호랑이처럼 이글거렸다. 조선인들은 함포를 쏴도 도망가지 않았고, 총이나 칼을 맞으면 그냥 쓰러지지 않고 조롱하는 얼굴로 적의 얼굴에 "칵"하고 피를 내뿜은 뒤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그런 조선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11월11일 한 달 동안 점거했던 강화성에서 철수하며 관아를 불태우고 보물, 무기, 서적 등 약탈한 전리품을 갖고 결국 중국으로 떠난다.
오랑캐들이 떠난 뒤 은밀한 장소에 숨겨두었던 왕실서적을 환안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정족사고에서 나갈 당시는 워낙 시급한 상황이었으므로 조정의 허락을 받기조차 어려웠으나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을 때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병인양요 뒤 정족사고에 보관되던 <조선왕조실록>이 지금의 규장각으로 가게 된 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1905) 뒤 일본군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부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은 뒤 조선에 대한 사실상의 식민지배를 시작한다. 이때 정족사고의 서적이 일제 통감부 도서관으로 옮겨졌고, 1924년 일제가 서울에 관립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세우며 다시 이곳으로 옮겨 놓는다. 경성제대는 광복 뒤 국립 서울대로 바뀌었고, 서울대 규장각이 계속해서 정족사고에 있던 왕실서적을 보관해오고 있다. 결국 일제에 의해 옮겨진 인천 강화의 유산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외지에서 머물고 있는 셈이다.
정족사고는 단층구조로 돼 있다. 전국의 다른 사고들은 모두 2층 구조인데 유일하게 정족사고만 단층으로 돼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고들이 보관 기능만 하는 반면, 정족사고의 경우 열람기능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향당'과 같은 별관 역시 정족사고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취향당 편액은 특히 영조임금이 전등사를 찾았을 때 직접 써서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 정족사고는 텅 비어 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있는 사고임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은 것도 과제로 지적된다.
범우 전등사 주지스님은 "일제에 의해서 서울로 가게 된 것인만큼 제자리로 환원하는 것이 민족정신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본다"며 "강화도나 인천에 국립기록문화유산 보존시설을 설립해 원자리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책과 출판의 문화사]
근대 과학혁명의 원동력이 된 인쇄술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유럽의 과학 논문은 종교 서적과 달리 시장이 형성돼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인쇄술의 도입으로 과학지식을 전파하는 방법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지만 알브레히트 뒤러처럼 뛰어난 판화가들은 동판화를 통해 지도는 물론 동식물의 모습, 해부도 등을 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이전에 사용됐던 목판은 인쇄를 거듭할수록 그림의 질이 떨어졌으나 금속판에 새겨진 삽화들은 더 정확한 시각 정보를 제공했다. 인쇄술을 통해 학술 서적이 유통되자 연구자들은 고대의 기록들을 좀 더 자유롭게 참고하고, 연구결과를 동료들과 서로 비교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16세기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코펜하겐의 서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선배 연구자들의 책을 접한 덕분에 그는 처음부터 혼자 출발해야 하는 어려움을 덜 수 있었고, 그들의 성과 위에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브라헤의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뒤를 이어 궁정 수학자가 되어 천체의 운동궤도가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과학자가 됐다. 하지만 왕족 혹은 귀족의 후원을 받아야 했던 시절의 천문학자였던 그는 당시엔 별점을 잘 쳐주는 점성술사로 더 높이 평가받았다.
파도바대학교 수학과 교수였던 갈릴레이 갈릴레오 역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의탁하고 있었다. 그는 1608년경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됐다는 풍문을 듣고 1609년 스스로 당대 최고 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다. 그는 반복적인 관측을 통해 예술가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달 표면이 실제로는 매끄럽지도, 평평하지도 않으며 정확한 원구 형태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피렌체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을 만큼 소묘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그는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이용해 자신이 관찰한 달의 돌출 부위와 함몰 부위를 명암법으로 표현했다.
명암법은 원근법과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인 성과이자 당대의 최신 기법이었다. 그 시절엔 성당 제단화로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묘사하는 무염시태(無染始胎) 같은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그려졌는데 이런 부류의 작품에서는 흔히 도상학적으로 달 위에 성모 마리아가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스페인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벨라스케스가 1618년에 그린 <무염시태>에는 달 표면이 매끄럽게 묘사돼 있지만, 갈릴레오의 친구였던 루도비코 치골리가 1612년에 그린 <무염시태>(로마 산타마리아 마조레 파울 교회 천장 벽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딛고 서 있는 달 표면은 울퉁불퉁하게 묘사됐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이어지는 서구의 근대과학혁명은 인쇄술에 의해 사실적이고 실증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획득하게 됐고, 인쇄술을 통해 이런 이미지들을 접하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의 눈이 아니라 과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 그것이 바로 근대의 서막이었다. 비록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천체를 관측해 펴낸 책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에 수록된 달 표면 이미지는 그만 인쇄업자의 실수로 달 표면의 앞뒤가 거꾸로 인쇄되긴 했지만 말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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