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1)역사의 보고(寶庫), 정족산 사고(史庫)
▲ 정족산 사고
▲ 장사각
선조들은 그 시대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고, 삼국시대 이래 많은 전쟁과 혼란을 겪으면서도 기록물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부단(不斷)했다. 오늘날 우리가 삼국시대의 사회상, 고려시대의 생활상, 그리고 조선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세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기록물들이 남아 있어 가능하다. 조선시대 사고(史庫)가 있었던 강화는 그런 의미에서 2015년 '책의 수도' 인천의 상징적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기록의 보존
'사고'(史庫)는 말 그대로 역사책을 보관하는 창고다.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실록을 사고에 보관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실록의 완전한 소실을 막기 위해 수도인 개경에 내사고(內史庫)를, 지방에는 외사고(外史庫)를 두어 2원 체제로 운영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방식은 계승됐다.

임금이 사망하면 임시 기구인 실록청(實錄廳)을 두어 전(前)왕의 실록을 편찬했는데, 그 자료의 중요성 때문에 한 부가 아닌 여러 부를 만들었다. 실록의 편찬 부수는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4부를 만드는 것이 정례였다.

4부의 실록을 보관하는 장소는 조선 전기와 후기에 차이가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 궁궐내의 춘추관(春秋館)과 충청도 충주, 전라도 전주, 경상도 성주 등 4곳에 사고(史庫)를 설치해 실록 1부씩을 보관했다. 조선 후기에는 춘추관 외에 강화의 마니산과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평안도 묘향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등 4곳에 사고를 뒀다.

조선 전기의 4사고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서울과 지방관이 거주하는 읍치(邑治)에 위치해 있었기에 화재 등으로 서책들이 몇 차례 수난을 당했다. 특히 임진왜란은 사고(史庫)의 위치에 대해 재인식을 하는 계기가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 요지들은 왜군에게 점령됐고, 그에 따라 전주 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의 서적은 불타 버렸다.

조선 후기에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됐는데, 실록의 편찬을 담당했던 춘추관이 서울에 있었으므로 춘추관 사고를 서울에 두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그 외의 사고는 모두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시켰다. 그러다가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불까지 나면서 인근의 정족산 사고로 이전했다. 묘향산 사고 역시, 후금(청)의 침입을 걱정해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이전했다. 따라서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돼 그대로 유지됐다.

사고(史庫)와 사관(史官)
건물은 대체로 2층 구조의 목조기와집 두 동이 앞뒤로 있는데, 하나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다른 하나는 왕실의 족보를 소장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이다. 서적은 방습효과를 고려해 2층 다락에 보관했다. 그밖의 부속건물로 소장된 서적들을 널어 말리는 포쇄청(曝?廳), 사고를 지키는 승병들이 머무는 승사(僧舍), 승병의 지휘관이 거처하는 승장청(僧將廳), 무기를 넣어두는 군기고, 사고 관리 책임자인 참봉(參奉)이 거처하는 건물이 부가됐다. 임진왜란 후에는 외사고들이 산중에 설치돼 사찰과 승려들이 사고를 지키는 조처가 시행됐다.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은 다음 왕이 즉위한 후 실록청을 열고 관계된 관리를 배치해 펴냈는데, 사초(史草)는 임금이라 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돼 있는 방대한 역사서다. 조선시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기록돼 있고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또한 사료 편찬에 있어서 사관이라는 관직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도 보장됐다.

조선시대 사관(史官)은 예문관(藝文館) 소속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벼슬을 말하는데, 이들이 소위 말하는 한림(翰林)들이다. 한림 8명과 겸사관 52명 등 모두 60명 정도가 활약했는데, 52명에 달하는 겸춘추는 당시 중요 관청에서 요직으로 일하던 대부분의 관료들을 망라한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춘추관은 없어졌다가, 광복 후 미군정청하에서 국사관(國史館)으로 발족되고, 1949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로 개칭되면서 수사관(修史官)·편사관(編史官) 등의 명칭으로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족산 사고
강화도는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이전에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면서 '고려왕조실록'(태조~강종)을 비롯한 국가의 주요 도서를 옮겨 28년 간 내사고(內史庫)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개경 환도(1270년) 이후에도 병란이 발생하면 실록을 강화로 피신시킨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실록의 재 인쇄가 시작된 1603년부터 재인쇄 작업이 끝나는 1606년까지 강화부내(봉선전 서쪽)에 사고를 뒀다. 이후 새로 재인쇄된 실록 4질과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 한 질 등 도합 5질본을 나눠 보관하기 위해 5사고 설치가 추진되면서 마니산사고도 설치됐다. 그러나 마니산사고도 1653년(효종4) 11월 사각(史閣)의 실화 사건으로 자료를 소실하게 되면서 정족산성(鼎足山城) 내에 사고를 새로 짓고 남은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됐다.

강화에 보관됐던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이라는 이름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화도가 국가의 중요 기록물을 안전하게 보관·보존했던 사실은 '책의 수도'를 지향하는 인천으로서는 중요한 역사문화자산이자 인천의 가치라 하겠다.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 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가 중요하듯이, 국사편찬과 보존 역시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이다. 선조들의 기록 보존에 대한 노력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역사의 교훈인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