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33.외국인 묘지
1965년 연수구 청학동 이전 … 정숙함 여전
▲ 1960년대 초까지 존립했던 북성동 외국인 공동묘지
개항 직후 인천 제물포에는 조선에서의 이권을 노린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각기 '조계지(租界地)'를 마련하여 온갖 특권을 누리며 눌러 살기 시작했고, 생로병사가 없을 리 없어 자연스럽게 외국인 묘역이 하나둘 부내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천시 중구 한복판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 조계지의 외곽이었던 야산에는 우리 매장 풍속과는 다른 일본인 공동묘지와 청국인 공동묘지가 들어섰다.

그 밖의 외국인들은 별도로 지금의 중구 북성동에 8000평에 달하는 '외국인 묘지'를 조성했다.

'의장지(義莊地)'라 불린 청국인 공동묘지는 1884년 3월 정부와 청국이 맺은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契章程)'에 의해 생겼다.

장정에는 "제물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지대 안에 청상들이 원하는 대로 좋은 산을 골라 공동묘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돼 있었다.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넓고, 묘지를 지킬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켰던 곳이 지금의 중구 내동 6번지 일대였다.

그 후 점차 도시의 규모가 커지자 1912년 남구 도화동 인천대학교 정문 일대에서 남동구 만수동, 부평 가족공원 등으로 이전했다.

일본인 공동묘지는 여러 곳에 있던 묘를 1902년 법부대신 이하영 소유였던 율목동 야산에 옮기면서 만들어졌다.

화장장도 있었는데, 1922년 지금의 중구 도원동 인천축구전용구장 앞 노상주차장 자리로 이전했고, 후에 그곳에 인천소방서가 들어서기도 했다.

북성동 '외국인 공동묘지'는 1883년 7월 첫 매장이 이뤄진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공동묘지였다. 1941년에 약 5천 평을 철도 부지로 수용 당했다.

인천과 인연을 맺은 영국인 21기, 미국인 14기, 러시아 인 7기, 독일인 6기 등 11개국 59명의 외국인이 묻혀 있었다.

1965년 연수구 청학동에 4천여 평의 새 묘역을 조성해 종래의 외국인 공동묘지를 이전했다.

북성동 시절 나지막한 돌담 안에 펼쳐져 있던 푸릇푸릇한 잔디와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묘비가 연출해 내는 정숙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