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29. 한국 마라톤의 영원한 출발지 해안동로터리
인천, 일제강점기부터 마라톤 유행
현 파라다이스호텔 앞 기념비 세워
▲ 흔히 '해안동로터리'라고 부르던 현재 중부경찰서 앞 삼거리는 경인역전마라톤의 단골 출발지였다. 1960년대 중반 해안동로터리에서 서울을 향해 출발하는 건각들.
3월29일 오전 9시 '제15회인천국제하프마라톤대회' 출발 총성이 울리면 올해 인천애서 열리는 각종 마라톤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인천은 우리나라 마라톤 경주의 '페이스메이커(pacemaker)' 역할을 해왔다. 일제강점기 때 육상 경기를 즐기던 일본인들이 인천에 많이 거주한 탓에 인천인들은 '마라손(현재의 마라톤)'을 자주 접했다. 각종 체육행사에 으레 마라톤 종목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실력은 조선인이 한수 위였다. 주로 결승점 테이프를 끊은 것은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일본선수들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매일 길바닥을 달리던 조선인 인력거꾼이나 신문배달원 등이었다. 이에 주최 측은 대회 공고문에 '각력(脚力)을 사용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참가를 부득함'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광복 후, 1946년 7월28일 인천에서 '회사방문 계주대회'라는 독특한 마라톤 계주대회가 열렸다. 아침 9시 인천우체국(현 중동우체국) 앞에서 스타트하여 시내의 주요 회사, 공장, 상점 등을 발로 찍고 시청 앞에 골인하는 이색 경주였다. 아마도 인천경제의 부흥을 염원하는 레이스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계주대회는 이후 몇 년 동안 계속될 만큼 인기가 있었다.

1947년 6월22일 한국 마라톤의 경사스런 잔치가 인천에서 벌어졌다.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서윤복 선수가 인천항을 통해 금의환향한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부두에는 태극기를 든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민족의 기개를 떨친 영웅을 열렬히 맞이했다. 서 선수 일행은 자동차에 올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인천중학교에서 열린 개선 행사에 참석했다.

보스톤마라톤 제패를 기념하기 위해 바로 '경인양시교환역전경주대회'가 계획되었다. 인천부청-주안-부평-소사-오류동-영등포-서울시청 구간을 인천과 서울에서 각각 동시에 출발해 마라톤으로 두 도시의 우의를 다지자는 대회였다. 인천의 6개 팀은 준비가 되었으나 서울은 팀을 구성하지 못해 아쉽게도 이 레이스는 불발되고 말았다.

대회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경인간왕복역전경주대회는 광복 후 우리나라 마라톤의 대명사로 떠오르며 매년 계속되었다. 당시 어느 도시도 42.195㎞ 풀코스를 낼만한 번듯한 도로가 없었다. 열차가 달리던 철로변의 경인국도만이 그 길이를 감당할 수 있었다.

6.25 전쟁을 겪은 후 마라톤 대회는 한동안 뜸하다가 1959년 한국일보 주최로 '제1회 9.28 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참전 16개국 마라톤 선수들을 초청해 인천 해안동로터리를 출발하여 서울 중앙청 앞까지 달리는 경기였다. 1966년 제3회 대회에는 올림픽 2연패의 영웅이자 맨발의 마라토너, 6·25전쟁 참전용사로 널리 알려진 이디오피아의 아베베가 참가해 대회 진가를 높였다. 그는 2시간 17분 4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대회는 1969년 제4회 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인천 중구 해안동로터리는 우리나라 마라톤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이다. 경인간을 달리는 마라톤의 결승점은 시대에 따라 서울의 광화문, 시청, 삼각지, 용산, 서울운동장 등으로 바뀌었지만 출발지는 언제나 해안동로터리로 고정돼 있었다. 현재 파라다이스호텔 아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공원에는 국제마라톤대회 출발지를 알리는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인천에서는 2001년 인천육상경기연맹과 인천일보사가 공동으로 시작한 인천국제마라톤대회를 비롯해 100㎞나 되는 구간을 약 15시간 안에 완주해야 하는 강화갑비고차울트라마라톤대회, 인천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월미건강마라톤대회 그리고 강화해변마라톤대회, 정서진아라뱃길전국마라톤대회, 송도국제마라톤대회 등이 열린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