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0) 관세 행정의 효시, 인천해관(海關)
▲ 인천세관
▲ 초기 해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부산과 원산에 개항장을 설치했으나,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근대문물의 유입은 수도 서울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인천이 개항함에 따라 이뤄졌다. 그 중 부산 개항 후 무관세(無關稅)로 일관하던 관세행정이 개정돼, 인천 개항부터 외국과의 교역에 관세(關稅)를 징수할 수 있게 됐다. 무관세 7년만의 쾌거였다. 이에 정부는 세관 행정을 담당할 '인천해관'을 설립해 관세를 징수했지만, '뜻밖의' 재원은 이를 담보로 무분별한 외국 차관을 유입하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었다.

관세행정의 지연
관세징수는 한 국가가 외국으로부터의 상품유입에 맞서 국내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취해지는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로, 그것은 동시에 중요한 국가재정수입이 되기 때문에 외국과의 통상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수반돼야 할 제도였다. 그러나 근대적 통상외교의 경험이 없었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했는데 그들이 집요하게 요구한 무세관체제에 수수방관함으로써 관세자주권을 스스로 양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의 강압 때문에 관세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맺은 일종의 자유무역협정이었다.

일본의 교활한 수단에 의해 무관세 무역을 인정해 버린 조선정부는 부산을 개항한 뒤에야 비로서 관세자주권의 중요성을 깨달아 관세의 설정을 당면 중요 정책으로 삼고 해관 창설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수차에 걸친 일본과의 관세 재조정 협상이 결렬되자 조선은 부산 두모진(豆毛鎭)에 '자체적'으로 해관을 설치하고 대일무역에 종사하는 조선 상인에게만 세금을 부과하기에 이르렀다. 나름대로 조약을 피해 가는 묘수를 동원한 셈이었다. 그러나 거래 물품 가격이 급등함에 따라 일본 상인들이 동래부에 난입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은 내국인에게 부과하는 세금임으로 일본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태도를 취했으나 결국 일본 군함이 동원됐고, 일본군은 부산 앞바다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병사들을 상륙시키는 등 무력시위를 계속했기 때문에 조선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제3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 거기에 관세조항을 설정하고 이것을 일본과 각국에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될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관세자주권은 1882년 5월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일단 결실을 보아 10~30%의 비교적 높은 관세 부과 징수권을 인정받게 됐는데, 이후 조선은 관세 사무에 밝고 학문에 정통한 서양인 묄렌도르프를 초청해 총세무사라 칭하고 조선 해관을 관리하도록 했고 차후 조선 청년을 훈련시켜 그 업무를 대체토록 계획했다.

인천해관의 창설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온 묄렌도르프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해관의 창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근대적 기관으로서의 인천해관은 1883년 6월16일부터 수세 업무를 시작했는데(원산 6월17일, 부산 7월3일), 그 관할구역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의 5도였다. 해관은 청의 해관을 본받아 창설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창설 당시부터 청의 영향하에 놓여 있었다. 특히 총세무사의 임명권을 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1894년까지 청국해관에서 파견된 총세무사와 외국인 세무사들에 의해 관리·운영됐다. 한편으로 인천해관에서는 근대식 기상관측을 처음으로 시작했으며 등대의 설치도 담당했다.

수출입세와 톤세로 구성되는 관세는 해관 창설 직후인 1884년 2월 당시 총세무사 묄렌도르프가 해관세 수세업무를 위탁계약형식으로 일본제일국립은행에 양도함으로써 각 개항장의 지점에 징수 예치됐는데, 일본제일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가 생겨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이렇게 해관세 수세업무를 위탁계약 형식으로 넘겨줌에 따라 일본인들이 소정의 관세를 조선정부에 정직하게 납부했다고 볼 수는 없다.

관세를 징수하게 되자 조선정부는 1883년 8월19일 인천감리(통상사무)를 별도 임명해 외국영사와의 교섭사무, 조선상품수출관련업무, 관세율의 검토 등을 보고하는 업무를 수행토록 했지만, 해관세의 수입과 지출 내용을 보고했을 뿐 관세관리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1897년 10월 영국인 브라운이 러시아의 압력에 의해 재정고문직에서 해임되자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고 7척의 함선을 인천항에 입항시켜 무력시위를 감행하기도 했다. 1904년부터 일본에 의한 고문정치가 시작되자 재무행정의 개혁을 이유로 1906년 11월 세관사무는 외국인의 손을 떠나 전부 일본인의 수중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해관세의 활용
인천해관의 관세수입은 개항과 더불어 신설된 각종 기관의 경비 일부 및 기관에 고용된 외국인의 급료로 지출됐는데 이러한 정규적인 지출 이외에도 각 해관의 제반시설비 및 개항장 내의 각국거류지 공사비로 충당됐다. 그리고 정부의 지시에 따라 유학생파견비, 친군영, 광무국의 경비로 지출됐고 외국에 대한 각종 배상금으로도 지출됐다. 또한 관세수입은 당시 조선정부의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재원이었고 조선정부가 대외 차관에 있어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조선정부의 청·일 및 구미열강과의 차관은 대부분 관세수입을 담보로 성립됐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관세 전반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었고, 정부는 관세의 수입을 단지 궁핍한 재정을 타개하기 위한 국고의 수입증대를 위한 신재원으로만 파악했다. 관세 수입은 매년 증가해 정부재정에 응급적이고도 다각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개항에 수반하는 효용적 자금으로 운용되지 못한 채 대외 차관의 원리금 상환에 급급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욱이 일본은 해관은행인 일본제일은행을 통해 조선의 장·단기차관을 유인했다. 또한 원리금 상환을 '의도적으로' 지체토록 해 관세의 국고화를 저지하고 있었다. 결국 대외차관과 표리관계에 있던 관세는 국익에 도움을 주지 못한채 표류하게 됐고, 해관은 조선의 운명과 그 궤를 같이했던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