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포리는 강화도 서안의 작은 포구이다. 본시의 이름은 정포(井浦)였다. 우물이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지금도 옛 우물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700여년전 진도를 향한 삼별초군의 긴 항해가 있었다. 맞은쪽 구음까지 배꼬리가 닿을 정도의 징발선이 천여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1270년(고려 원종11년) 6월2일이었다. 육지에서는 이산의 통곡소리가 가득했다는데 그 자리에 1993년 『항몽유허비』가 세워졌다.

 삼별초란 몽고난 때 강도에 천도를 강행한 권신 최우의 사병 조직이었다. 당초 야별초였으나 차츰 숫자가 늘어나자 좌우별초로 나누고 다시 몽고병에게 포로되었다가 도망쳐 나온 자들로 신의군을 조직함으로써 셋을 합쳐 삼별초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들이 권신의 사병 노릇을 했던 것은 사실이나 외적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만큼 몽고에 굴복 개경으로 환도한다는데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에서의 항몽 40년을 견디지 못하고 송도로의 환도가 결정된 것은 열흘 전인 그해 5월23일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삼별초가 그날 밤으로 창고를 습격하는 등 행동으로 나섰다. 출륙한 원종이 해산시키려 하자 6월1일 배중손 등이 무기고를 열어 군사를 무장하는 한편 왕손중에서 신왕을 뽑고 관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짐작 다음날 부녀자와 노비들 까지 배에 태워 남행길을 떠났다. 서해의 섬들을 따라 두달반만에 전남 진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진도를 수도로 남해 거제 제주 등 주변의 30여 섬들을 장악 한때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여몽 연합군의 토벌도 계속되어 배중손은 전사하고 두번째 지도자인 교동 출신의 김통정이 제주도로 옮겨 그 곳을 본거지로 했으나 역시 원정군에게 함락되고 김통정은 70여명을 이끌고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결함으로써 삼별초는 3년만에 막을 내렸다.

 삼별초의 재조명을 위한 학술세미나가 지난 주말 강화군에서 있었다. 삼별초를 연고지로 한 강화 진도 북제주군의 3군 합동으로였다. 이 세미나에서 선인들의 자주정신을 교훈으로 부각시켜야 함이 강조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