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수필가
지난해 12월 어느날 인터넷을 통해, 한편의 단편영화를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다. 지난 2001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이미 상영된 바 있는 영화 '버스 44'는 대만계 미국인 다이안 잉(중국명 伍仕賢) 감독이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 상영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이다. 하지만 짧은 내용이 우리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작지 않다. 그래서일까 필자의 가슴에 긴 여운이 남아 있어 소개해 본다.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어느 시골 버스에 승차한 두 명의 남자가 강도로 돌변해, 승객들을 칼로 위협하여 돈을 빼앗고, 또 버스 여성운전사를 길가 숲속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버스 안 여러 승객들이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그중 한 명의 남자가 강도들의 악행을 제지하려 했지만, 되레 주먹으로 얻어맞고 휘둘린 칼에 다리에 상처를 입고 쓰러진다. 급기야 여성운전자는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그녀는 버스로 돌아와 뺨에 흘려 내린 피를 훔치면서 침묵하고, 방관한 승객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본 뒤, 운전석에 앉아서 어깨를 들썩이며 원망에 찬 울음을 운다. 그때 자신을 도우려다 다친 남자가 절뚝이면서 걸어와 승차하려고 하자, 그녀는 화를 내며 차문을 닫고 그의 가방마저 차창 밖으로 던져 버린다. 그 남자는 억울하다고 항의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길가에 남겨 둔 채, 버스는 떠나고 만다. 몇 분 뒤에 여성 운전사는 불의에 침묵하고 방관한 승객들과 함께 버스를 절벽으로 추락시켜 전원 죽게 한다"

한마디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고발하는 영화다. 필자는 여성 운전자의 이런 끔찍스런 행위에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일말의 동정심은 간다. 그러나 무기력하고 정의감이 없는 나약한 승객들의 태도에는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한다. 두 명의 강도에 대해 여러 승객들이 협력하여 강력하게 저항했더라면 그들은 겁을 먹고 뜻을 포기한 채, 도주했을 것이다.

섬뜩한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한편 우리사회는 '버스44'의 승객과는 달리 불의를 증오하면서, 정의를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풍토인가. 곰곰이 되새겨 봐야한다. 과거 한때 '정의사회구현'이 정부의 국정목표가 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과에 대해선 평가가 인색하다. 인간 삶속에서 정의의 가치는 소중하다. 만일 사회정의가 실종되면 불의를 응징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시민들의 불타는 정의감과 의로운 분노는, 국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흔히 인구에 회자되는 정의와 불의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의 전자는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바른 도리'이고, 후자는 '정의롭지 못하고 도리에 어긋남'으로 규정되어 있다. 사실상 정의와 불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은 늘 피해를 보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참는 게 약이다'는 인식이 깊이 배어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사회정의가 감각이 무뎌진 굳은살이 되어선 안 된다. 또한 더 큰 문제는 내가하는 것은 정의고, 상대방하는 것은 불의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한발 더나가 이미 우리사회는 진영논리에 익숙해졌다. '같은편'이 하는 일이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무조건 옹호하고, '다른편'이 하는 일이 아무리 효과적이고 좋다하여도 무조건 비판하고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렇게 되면 정의가 불의로 바뀔 수도 있고, 불의가 정의로 둔갑할 수도 있지 않은가. 대부분 사람들은 불의는 그냥 나쁘다는 편의적 인식 수준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진영논리만 집착하면 외눈박이가 되어 정확한 판단마저 어렵게 만들고,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 양심 따위는 버리게 된다. 실제로 진영논리의 고정관념을 깨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 한편 정의가 넘친 세상은 상식이 통하고 공정하며, 준법정신이 함양되어 부정부패와 권력비리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또한 서민의 삶은 안정되고, 시민의식이 성숙된다. 다른 한편 불의가 판친 세상은 원칙이 실종되고 반칙이 난무하여, 강력범죄가 증가한다.

또 삶의 질이 추락하고, 사회적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그 뿐만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가 휘청거린다. 사실상 삶속에서 정의는 디딤돌이고 불의는 걸림돌이다. 만일 불의가 정의의 발목을 잡게 되면 그 사회는 병들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께서는 "옳은 일을 짓밟는 것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기에 있는 사람을 보거든 구해줄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목숨을 던져 나라를 바로 잡는데 힘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자주 되새겨 볼 명언이다.

언제쯤 우리사회에 정의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행복이 들꽃처럼 만발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까. 우리 국민들의 간절한 희망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