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29)심언광의 경신역(慶信驛)과 유숙의 제물포(濟物浦)
▲ '해동지도'의 경신역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형(士烱), 호는 어촌(漁村)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한 후, 지평·정언·이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다음은 '어촌집(漁村集)'에 전하는 '인천 해안역에서 조수를 보다(仁川海安驛 觀潮汐)'라는 시이다.

冥觀一理任呼吸(명관일리임호흡)
조용히 하나의 이치를 살펴 호흡에 맡기니

汐去潮來成古今(석거조래성고금)
조수의 오고 감은 옛일이 되었네

天地盈虛知有數(천지영허지유수)
천지의 차고 빔에 운수가 있고

陰陽消息自無心(음양소식자무심)
음양은 저대로 무심히 순환하네

堯遭洪水岡陵沒(요조홍수강릉몰)
요 임금이 홍수를 만나 고개와 언덕이 물에 잠겼는데

禹鑿龍門汝漢深(우착룡문여한심)
우 임금이 용문을 뚫자 여수와 한수는 깊어졌네

最是雄奇難狀處(최시웅기난상처)
웅장하고 기묘하여 제일 형용하기 어려워서

未臨收入筆端吟(미림수입필단음)
붓 끝의 솜씨로 담아 읊을 수 없네

해안역(海安驛)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바닷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며 역참(驛站)의 이름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경신역(慶信驛)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역참은 중앙과 지방의 공적인 소통을 위해 마필(馬匹)을 제공하는 곳이다. 인천 남동구 지역에는 삼국시대부터 역사(驛舍)가 존재했는데, 수산동에 있던 경신역이 그것이다. 경신역을 지나 수월(水越, 무너미) 고개를 넘으면 부평 땅에 다다를 정도로 역참은 교통의 주요 거점에 위치했다.

경신역에서 조수의 흐름에 따라 주변의 경관이 바뀌는 광경을 읊고 있다. 경관을 응시하다가 잠깐이라도 딴청을 피우면 조금 전에 보았던 것이 옛일이 될 정도로 조수의 흐름에 따른 경관의 변화는 작자가 표현한 대로 '웅장하고 기묘하여 형용하기 어려웠'다. 작자는 갯고랑이 깊어지거나 혹은 사라지는 모습을 요순(堯舜) 시대의 홍수와 대규모 토목공사에 기대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차마 붓끝으로 담아낼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유숙(柳潚, 1564~1636)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연숙(淵叔), 호는 취흘(醉吃)이다. 1597년(선조 30) 병과로 급제한 후, 병조참지·부제학·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은 '취흘집(醉吃集)'에 전하는 '제물포(題濟物浦)'라는 시이다.

又踏畿西地盡隅(우답기서지진우)
또 이렇게 경기 서쪽 땅 끝에 이르니

滿汀蘋蓼是歸途(만정빈료시귀도)
물가 가득히 수초들이 내가 돌아갈 길에 있네

茫茫大海迷諸島(망망대해미제도)
망망대해의 여러 섬들이 어지럽게 떠 있고

歷歷群峯辨兩湖(역력군봉변량호)
선명한 봉우리들 사이에 두 개의 호수가 있네

鷺下漁梁潮欲退(노하어량조욕퇴)
백로가 어살에 내려앉자 조수는 물러나고

角殘荒戍日將晡(각잔황수일장포)
나팔소리 끊긴 황량한 초소에는 해가 지고 있네

書生不解論弓釰(서생불해론궁일)
서생은 활과 칼을 알 수 없어서

獨倚危樓看畫圖(독의위루간화도)
홀로 난간에 기대 그림 같은 풍경을 보네


제물(濟物)은 조선 초부터 있었던 수군기지 제물량(濟物梁)에서 비롯되었다. 제물포 인근의 수군기지의 변동은, 남양에 있던 영종진이 효종 4년(1652)에 자연도(영종도)로 옮겨왔고, 효종 7년(1656) 제물진이 강화도로 이전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변동을 고려했을 때, 위의 시는 병자호란(1636) 이전의 평화롭고 한적한 제물진의 모습을 소재로 하고 있다. 작자는 시선을 가까운 데에서 먼 데, 그리고 다시 가까운 데로 옮기며 소회를 읊고 있다. 수초에 있던 시선이 먼 바다의 섬들을 향했다가 다시 갯가에 있는 어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시선이 가깝고 먼 것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석양빛이 깔리고 있는 상황에서 하얀빛(백로)과 검은빛(갯벌), 자줏빛(수초)과 푸른빛(바다)의 대비를 즐기고 있었다. 이른바 '그림 같은 풍경'을 '눈돌리기(游目)'에 기대 포착해냈던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