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27. 다시 거론되고 있는 국기 하강식
▲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얼음땡'이 된다. 1989년 까지 매일 해가 질 무렵 동인천역 광장에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처럼 모든 사람은 경건하게 태극기를 향했다. /사진제공=김보섭
1978년 10월부터 애국가 연주 맞춰 시행 … 시민들 일제히 부동자세

불량태도 보이면 즉심 회부도 … 국가주의 과잉 비판속 1989년 폐지



사라졌던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을 정부가 의무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행정자치부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저조한 태극기 게양 비율을 높이고, 국가의식을 고취하는 방안으로 이미 폐지된 국기 하강식을 다시 시행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 문제는 영화 '국제시장'의 국기 하강식 장면과 맞물려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언쟁을 벌이던 부부가 국기 하강식과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싸움을 멈추고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기 하강식은 1978년 내무부 지침에 의해 의무적으로 시행되었다. 그해 10월1일부터 관공서와 공공단체, 학교 등에서는 매일 하오 6시(겨울철은 5시) 정각에 라디오와 TV에서 나오는 애국가 연주 방송에 맞춰 범국민적으로 실시되었다. 국기 하강식을 볼 수 있거나 애국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모든 옥외 국민은 그 자리에서 국기를 향해 차렷 자세로 경례를 하고 그것을 볼 수 없는 옥내에서는 차렷 자세만 취하되 옥내에 태극기가 걸려 있을 때는 국기를 향하고, 없는 경우에는 애국가가 연주되는 방향을 향하도록 했다.

운행 중인 차량이나 공연 중인 극장 그리고 경기가 진행 중인 운동장 등에서는 제외됐다. 민간단체나 직장에서는 우선 주 1회 (매주 월) 자율적으로 실시하되 점차 확대해 나가야 했다.

이를 위해 상가와 사무실 등 민간 건물에서는 국기 게양대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했다. 크든 작든 모든 건축물의 설계도에는 우선 국기 게양대를 그려 넣어야했다. '민간건물 국기 게양대 설치 의무' 조항은 1999년 5월 삭제되었다. 이에 앞서 국기 하강식은 지나친 국가주의의 과잉이라는 비판 속에 1989년 1월 이후 사실상 폐지되었다. 당시 종교계의 요구가 결정적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사진은 1980년대 초 동인천역 광장에서 진행된 국기 하강식 장면이다. 기차를 이용하기 위해 역 대합실로 급하게 향하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서서 부동자세로 경건하게 역사 위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바라보고 있다. 넓은 광장이 없던 인천에서는 동인천 역전에서 진행된 이 국기 하강식이 대표적이었다. 사람들은 자칫 국기 하강식에 걸려 기차를 놓칠까봐 시간이 임박하면 급하게 광장을 가로 질러가곤 했다. 애국가가 나올 때 심하게 불량한 태도를 보인 사람은 즉심에 회부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아이들로부터 '공산당인가 봐'라는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

국기 하강식 시행에 앞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두고 3월1일부터 극장에서는 의무적으로 애국가를 틀어야만했다. 영화 관람 전 애국가와 태극기 화면이 나오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누군가 미 8군 영내 극장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것을 보고 감동받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이를 건의했다는 설이 있다. 문화공보부에서는 전국 381개 극장에 애국가 상영을 지시했고 나중에는 읍면동 포함해서 전국 782개 모든 공연장으로 확대했다.

국기 하강식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1987년 2월 탈북의 물꼬를 튼 김만철 씨 일가족이 서울 시내 나들이하던 중 오후 5시 국기 하강식이 진행되었다. 갑자기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차렷 자세로 한동안 서있자 김 씨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안내원에게 "무슨 일이냐"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1981년 3월25일에 실시되는 제 11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울산의 한 사람은 입후보 등록마감일에 등록 서류를 갖고 선관위로 급하게 향했다. 오후 4시 59분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마침 국기 하강식이 진행되었다. 서류를 제출할 때는 이미 1분여가 지체돼 마감 시간이 지났다. 선관위 측은 회의를 열어 마감을 넘겼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고 결국 그 사람은 그 해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당시 국기 하강식은 신성불가침의 의식이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