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29.해운회사
정부, 기선회사 '이운사' 내세워 대항마로
정부, 기선회사 '이운사' 내세워 대항마로
1882년 이후 통상관계를 맺게 된 청국과 서구 열강도 해운업에 침투하면서 우리나라의 해운업은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강철로 된 증기선과 견고한 서양형 범선이 상품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대량 운송해 취약한 구조의 재래 판선(板船)을 압도하였던 것이다."(나애자ㆍ'개항기의 민간 해운업', 국사관논총 53집) 당시 정부는 재래 판선을 근대적 선박으로 교체하려고 애를 썼다.
눈 뜬 채, 속수무책으로 열강에게 해운권(海運權)을 넘겨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천 개항 직후 객주와 일반상인들이 주축이 돼 합자회사 형태로 설립된 몇몇 '상회사(商會社)'는 자본이나 기술력으로 볼 때 아직 해운사를 운영할 수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1883년부터 기선을 이용하여 세곡을 운송하고 있었지만, 이미 바닷길은 청국과 일본의 안마당이 되어 있었다.
1885년 10월에는 일본우선주식회사가, 1893년 3월에는 오사카상선주식회사가 각각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여 정기 운항선을 취항시켰다.
'이운사'는 그 같은 정황 속에서 설립된 우리의 기선회사였다.
표면적으로는 민영준, 정병하, 우경선 등이 관여한 회사 조직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정부 기업이었다.
민영준은 사장, 정병하는 운영, 인천항 경무관이었던 우경선은 사무 일체를 관장했다.
이 회사는 전운국(轉運局)에서 인수한 400t 급 창용호, 현익호와 독일서 들여온 1000t 급 이운호, 중국ㆍ일본제 소형 선박 5척 등을 소유했는데, 청일전쟁 때 징발당해 일본의 군수물자를 수송했고, 그 후 일본우선주식회사에 위탁하면서 업무를 중단했다.
1896년 영업을 재개했지만, 갑오경장 때 실시한 조세의 '급납화(金納化ㆍ돈으로 냄)'로 세곡 운송이 줄어들자, 세창양행에 위탁 경영을 시켰다.
그로써 그간 독점하다시피 했던 이운사가 '세창')에 넘어가게 되면서 해운계는 민간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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