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는 『목숨수』자가 들어있는 지명이 많다. 예를 들어 장수 만수 수산 연수동 등이다. 그중 장수동의 경우 한자의 뜻대로라면 장수하는 동리이다. 근래 도시화의 때에 찌들어 어지러운 구석이 있기는 해도 예전의 전원이 그런대로 살아있어 그런 곳에 살다보면 장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장수동은 소래산 관모산 등을 정점으로 형성된 깊숙한 골짜기여서 그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덜할 수 있었다.

 장수동은 원래 구한말까지만 해도 장자리로 불리던 곳이다. 1914년 부군 통폐합때 부천군 조동면 장자리에서 남동면 장수리가 되어 처음으로 장수란 이름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40년 인천시에 편입되고 해방과 더불어 비로소 인천시 장수동이 되었다.

 장수동은 서로가 거리를 둔 만의 수현 장자의 3개 부락으로 형성된다. 만의는 대공원의 끝자락 깊은 골에 위치하고 장자는 지금의 수인산업도로변 장수동 동사무소가 있는 부락이며 수현은 송내역으로 넘어가는 무네미 고개이다. 이중 장자리는 그렇게 이름지어진 그런대로의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조말 나라가 어지러워 도둑이 횡행할때 여덟명의 장사가 몰려온 도둑떼를 잡아 고목에 결박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 청장년들이 모여 입안에 주먹넣기 겨루기를 하여 장사를 뽑았다고도 한다.

 특히 만의골에는 수백년 된 고목과 10여명의 장정들이 모여앉아 식사를 할 만큼 널직한 소반바위가 특이하다. 그리고 해마다 칠월칠석이면 고목에 마을의 평안을 비는 치성을 드렸다. 우선 나무에 소를 매놓아 하룻밤을 지낸 후 도축하여 고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주민들로부터 비용의 갹출도 어려워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시도때도 없는 무녀들의 굿판이 벌어져 동네가 시끄럽다고 주민들이 푸념하고 있단다.

 그런데 본지의 보도로는 만의골의 은행나무가 치성 드리는 무속인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술과 제물을 마구 버리기 때문이다. 높이 35m에 둘레 8m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800년이나 되는 거목의 보호수여서 남동구가 보호책의 묘수를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